바둑판 위에 말 하나를 올려놓고 이렇게 규칙을 정해 보자. 한 번 밟은 칸은 다시 밟지 않는다. 매번 상하좌우 네 방향 중 하나를 골라 한 칸씩 움직이되, 이미 지나온 칸으로 되돌아가는 수는 금지한다. 이렇게 만든 길을 수학에서는 자기회피 산책(self-avoiding walk)이라 부른다. 2026년 10월 29일 arXiv에 올라온 논문 「Quantitative sub-ballisticity of self-avoiding walk on Z^d」는 이 단순한 규칙에서 나오는 아주 미묘한 질문 하나를 다룬다. n걸음 걸었을 때, 말은 출발점에서 얼마나 멀어질 수 있는가.
겹치지 않는 길이라는 규칙
규칙은 한 줄이지만 이 대상은 오랫동안 수학자와 물리학자를 괴롭혀 왔다. 고분자 사슬은 자기 자신과 겹칠 수 없고, 용매 속에서 무작위로 흔들리면서도 스스로를 뚫고 지나갈 수는 없다. 그래서 자기회피 산책은 고분자의 통계역학적 장난감 모형으로 쓰이고, 동시에 조합론에서는 세는 문제로, 확률론에서는 상전이 문제로 등장한다. 같은 대상을 서로 다른 언어로 부르는 셈이다.
중요한 것은 이 산책에 균등 측도를 준다는 점이다. n걸음짜리 자기회피 경로를 전부 같은 확률로 뽑는다. 경로의 개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때문에, 이 균등 측도 아래에서 전형적인 경로가 어떤 모양을 하는지가 곧 물음이 된다. 종이에 몇 개 그려 보면 대부분은 구불구불하고, 가끔 유난히 곧은 것이 섞여 있다. 논문이 보는 것은 그 꼬리, 즉 아주 드물게 나타나는 곧은 경로다.
격자 위의 자기회피 경로. 한 번 지난 점을 다시 지나지 않으면서 이어 붙인 길로, 스스로를 피하려는 성질이 경로 전체의 모양을 결정한다 — Rocchini,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보통의 산책과 무엇이 다른가
비교 대상은 규칙이 하나 빠진 단순 무작위 산책이다. 이때는 매 걸음이 독립이라 계산이 쉽고, n걸음 뒤 위치는 대략 출발점에서 √n 거리에 있다. 걸음 수를 네 배로 늘리면 거리는 두 배가 된다. 반면 자기회피 산책은 과거 전체가 미래를 제약한다. 독립성이 사라지고, 대신 “이미 지나온 자리는 막혔다”는 기억이 남는다.
기억이 남으면 경로는 어떻게 될까. 직관적으로는 곧아질 것 같다. 스스로를 밀어내는 힘이 있으니 몸을 비틀지 못하고, 앞으로 뻗으려 할 것이다. 실제로 많은 이들이 이 산책은 걸음 수에 비례해 멀어질 것, 즉 “탄도적(ballistic)”일 것이라고 기대해 왔다. 이동 거리가 n에 정비례한다는 뜻이다. 이 기대가 옳은지가 이 분야의 오랜 질문이었다.
논문이 내놓은 숫자: n 나누기 exp(c log* n)
논문은 먼저 꼬리 확률에 대한 정량적 추정을 내놓는다. n걸음짜리 자기회피 산책이 출발점에서 거리 vn 이상 떨어질 확률이, v에 대해 지수적으로 감소한다는 것이다. “아주 멀리 가는 경로는 아주 드물다”를 부등식 하나로 바꾼 셈이다. 이로부터 따라 나오는 결론이 논문의 간판이다. n걸음 산책의 변위는 매우 높은 확률로 n / exp(c log* n) 을 넘지 않는다.
여기서 log* n 은 반복 로그다. n에 로그를 몇 번이나 취해야 1 아래로 내려가는지를 세는 함수로, 믿기 어려울 만큼 느리게 자란다. n이 10의 100제곱이어도 log* n 은 다섯 남짓이다. 그러니 n / exp(c log* n) 은 n보다 겨우 조금 작다. 상한은 사실상 “직선에 극도로 가깝지만, 직선은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이 결과가 의미를 갖는 이유는 이전에 알려진 것이 정량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Duminil-Copin과 Hammond의 앞선 연구는 변위가 o(n), 즉 n보다 느리게 자란다는 것까지만 보였다. 그러나 “n보다 작다”는 진술은 얼마나 작은지, 어떤 속도로 작은지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논문은 그 o(n)에 처음으로 구체적인 함수 모양을 붙였다.
반직관: 스스로를 밀어내도 직선이 되지 않는다
여기가 이 논문의 진짜 반전이다. 자기회피 산책이 곧게 뻗는다는 기대는, 바꿔 말하면 변위가 n에 정비례한다는 주장이다. 논문이 증명한 것은 그 정비례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리 상한이 n에 가까워도, n과의 비율은 1이 아니라 0으로 간다. 자기 자신을 피하려는 압력은 경로를 곧게 만들지 못하고, “거의 곧은” 상태에 붙잡아 둔다.
직관이 어디서 어긋났는지 짚어 보자. 스스로를 밀어내는 힘은 경로를 앞으로 미는 동시에, 지나온 자국을 장애물로 남긴다. 앞으로 가려면 자국을 옆으로 비켜서야 하고, 그 비킴이 쌓이면 경로는 결국 미세하게 휘어진다. 곧음은 유지되지만 완전한 곧음은 유지되지 않는다. 논문의 상한은 이 미세한 휘어짐이 확률적으로 얼마나 강하게 나타나는지를 재는 도구다.
재미있는 것은 그 차이가 실용적으로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상한과 n의 차이는 로그를 반복해서 취한 만큼, 즉 극히 작다. 수학적으로는 0과 1 사이의 거대한 간격이고, 물리적으로는 거의 구별되지 않는 차이다. 두 사실이 동시에 참이라는 것이 이 정리의 성격이다.
경쟁 가설과 반론
이 결과를 읽을 때 조심할 지점이 있다. 자기회피 산책의 변위 지수를 ν라고 하면, 변위는 n의 ν제곱으로 자란다고 기대된다. 2차원에서는 ν가 3/4로 알려져 있고, 이 값은 1보다 작으므로 탄도성이 아예 성립하지 않는다. 즉 2차원에서 “직선이 아니다”는 것은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논문이 어려운 곳은 고차원이다.
고차원에서는 평균장 근사가 잘 맞아 ν가 1/2에 가까워지고, 아주 높은 차원에서는 산책이 스스로를 거의 만나지 않아 단순 무작위 산책처럼 행동한다. 그렇다면 중간 차원, 그리고 높은 차원에서 정말 탄도적인지는 별개의 문제다. 탄도성을 지지하는 쪽은 “자기회피가 강해질수록 경로는 곧아진다”는 직관을 근거로 든다. 논문이 제시하는 반론은 정량적 상한 그 자체다. 어떤 v에 대해서도 vn 밖으로 나갈 확률이 지수적으로 줄어든다면, 정비례는 나올 자리가 없다.
길이 6의 무작위 산책 다섯 개. 같은 규칙, 다른 결과 — 자기회피 조건이 없으면 경로는 서로 겹치는 것을 개의치 않는다 — Felix Kälberer,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물론 반대 방향의 여지도 남는다. 논문이 보인 상한은 매우 높은 확률로 성립하는 상한이지, 변위의 정확한 차수를 확정한 것은 아니다. 더 강한 하한, 즉 “적어도 이만큼은 간다”가 증명된다면 그림이 달라진다. 논문은 이 지점을 열린 문제로 남긴다.
증명이론이라는 낯선 도구
방법론도 흥미롭다. 저자들은 기존 증명을 새로 쓰지 않고, Duminil-Copin과 Hammond의 원래 증명을 정량적으로 분석했다. 그 증명은 비건설적이다. 결론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가정해 모순을 이끌어내는 방식이라, “얼마나 빨리”에 대한 정보를 남기지 않는다. 논문은 여기에 증명이론(proof theory)의 기법을 적용해, 모순에서 꺼낼 수 있는 양적 정보를 뽑아낸다.
부산물도 하나 있다. 임계점에서 길이 n짜리 다리(bridge)의 분배함수가 평균적으로 C / log log n 으로 억제된다는 정리다. 다리는 경로의 끝이 시작점과 같은 높이에 오도록 묶은 대상으로, 분배함수는 그런 경로들의 총가중치를 뜻한다. 이 억제는 로그를 두 번 취한 정도로 매우 약하지만, 저자들은 이것이 독립적으로 유용하리라고 본다.
논문이 인정한 한계, 그리고 남는 질문
논문 스스로 밝히는 한계는 분명하다. 첫째, 결과는 상한이다. 변위가 n/exp(c log* n) 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지, 실제로 그만큼 간다는 것을 보인 것은 아니다. 둘째, 반복 로그는 극도로 느리게 자라므로 이 상한은 n과의 차이가 사실상 미세하다. “탄도적이 아니다”라는 결론은 질적으로는 강하지만, 양적으로는 아주 약한 형태다.
셋째, 방법이 기존 증명의 정량화에 기대고 있어, 그 증명 구조에 내재한 손실을 그대로 물려받는다. 더 날카로운 상한이나 차원별로 다른 거동을 얻으려면 다른 접근이 필요할 수 있다. 저자들도 이 점을 인정하고, 남은 물음을 다음 과제로 둔다.
그래서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스스로를 피하는 규칙 하나가 경로를 “거의 곧지만 완전히 곧지는 않은” 상태에 가두는 이 현상을, 우리는 어디서 다시 만나게 될까. 고분자 사슬의 물리, 격자 위의 세기 문제, 아니면 전혀 다른 곳의 최적화 문제에서일까. 그리고 만약 누군가 이 상한을 하한으로 바꾼다면, 그때 우리의 직관은 어느 쪽 편이 되어 있을까.
참고 자료
Ekin Arikök, Christoforos Panagiotis, Nicholas Pischke, Thomas Powell, 「Quantitative sub-ballisticity of self-avoiding walk on Z^d」, arXiv:2610.40520 (2026-10-29).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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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1.01 07:48
종이에 자기회피 산책을 그려 본 적이 있는데, 몇 걸음만 지나면 막다른 골목에 갇히더라고요. 그런데 이 글을 보면 그렇게 비켜 가는 걸음들이 쌓여도 결국 직선에는 못 미치는 거네요. '거의 곧지만 곧지는 않다'는 표현이 은근 오래 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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