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9월 11일, 영국 싱크탱크 왕립예술협회(RSA, Royal Society of the Arts)가 발표한 보고서 하나가 영국 유통업계를 조용히 뒤집었다. 2011년부터 2018년까지 영국의 하이스트리트(High Street, 동네 중심 상점가)에서 자동화와 전자상거래로 사라진 소매업 일자리가 10만 8천 개인데, 그중 70%가 여성 직원의 자리였다는 것이다. BBC는 이날 이 보고서를 '"Women hit hardest by High Street job losses"'(하이스트리트 일자리 감소, 여성이 가장 크게 맞았다)라는 제목으로 전했다.
이 글의 주제는 "가게가 몇 개 문을 닫았나"가 아니다. 가게가 없어지면서 누구의 일자리가, 어디서, 어떤 형태로 옮겨 갔는가다. 같은 기간 영국 온라인 유통업체들은 창고·물류 일자리 4만 개를 새로 만들었지만, 그중 4분의 3을 남성이 차지했다. 숫자 두 개를 나란히 놓으면 이야기가 시작된다.
영국의 하이스트리트는 무엇이고, 한국의 '상권'과 어떻게 다른가
영국에서 하이스트리트는 특정 거리 이름이 아니라 '동네 중심 상점가'를 뜻하는 일반명사다. 런던의 옥스퍼드 스트리트처럼 관광지 성격이 강한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중소도시의 중심가 한 줄에 은행 지점, 약국, 신발가게, 카페, 자선단체 샵(헌옷·중고품 기부 판매점)이 줄지어 있는 형태다. 한국으로 치면 지방 중소도시의 '중앙로'나 역 앞 상가 거리에 가깝다.
제도 쪽이 한국과 크게 다르다. 영국 상업용 부동산은 대개 임대차(leasehold) 방식인데, 보증금보다는 '몇 년짜리 계약인가'가 핵심이다. 상가 임대는 흔히 10년 이상 장기 계약에 수년 단위의 임대료 재산정(rent review) 조항이 붙는다. 한국식 전세·보증금으로 큰 목돈을 맡기는 구조가 흔하지 않고, 권리금(기존 장사의 영업권·시설에 붙는 값)을 주고받는 관행도 한국만큼 제도화되어 있지 않다. 임차인이 나가도 매장 인테리어와 영업 가치에 돈을 받기 어렵다는 뜻이다.
대신 영국 상가에는 비즈니스 레이트(business rates)라는 재산세가 매년 부과된다. 이번 기사는 상권 부진의 원인으로 온라인 쇼핑 확산, 일부 지역의 높은 비즈니스 레이트, 금융위기 이후 소득 압박을 든다. 다만 임대차 계약 구조와 보증금·권리금 관행이 지역별 일자리 감소와 어떻게 연결되는지는 이 기사에 직접 다뤄지지 않았다 — 확인되지 않음. 아래 제도 설명은 일반적 배경이며, 기사의 수치와는 별개로 읽어야 한다.
70퍼센트라는 숫자가 드러낸 것
RSA 보고서의 핵심 수치는 세 개다. 첫째, 2011~2018년 자동화·전자상거래로 줄어든 소매업 일자리 10만 8천 개 중 70%가 여성. 둘째, 같은 기간 온라인 유통업체가 만든 창고·배송 일자리 4만 개 중 4분의 3이 남성. 셋째, 지역 격차다. 잉글랜드 북동부(North East)와 이스트미들랜즈(East Midlands)는 소매업 인력이 11% 줄었지만, 런던은 같은 기간 16% 늘었다.
보고서 저자 파비안 월리스스테픈스(Fabian Wallace-Stephens)는 "하이스트리트 쇠퇴가 가져오는 경제적 고통이 고르게 느껴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여성 직원이 사라진 자리에는 남성 직원의 배송·창고 일자리가 들어섰고, 그 일자리는 다른 곳에 생겼다. 매장 직원은 동네 가게에서 일했고, 배송기사는 물류센터로 출근한다. 직업이 바뀐 게 아니라, 대부분의 여성에게는 직업이 사라졌다고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왜 여성의 일자리였나 — 업종 구성과 근무 형태
영국 소매업, 특히 하이스트리트의 점원·계산원 직군은 오랫동안 여성이 다수를 이루는 분야였다. 기사에 등장하는 청년여성신탁(Young Women's Trust) 대표 소피 워커(Sophie Walker)는 그 이유를 두 겹으로 설명한다. 하나는 "성차별적 진로 지도"가 여성을 이 업종으로 유도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돌봄 책임이다. 여성이 가족 돌봄을 더 많이 떠안기 때문에 집에서 가까운 시차제·파트타임 일자리가 필요하고, 동네 가게가 그 수요를 받아 왔다는 논리다.
이 지점이 '상권 몰락'과 '노동시장 구조'가 만나는 자리다. 무인 계산대 같은 자동화 기술은 주로 간헐적·파트타임 근로를 가장 많이 줄인다. 즉 하이스트리트의 매장 하나가 닫히는 사건은 단순한 폐업이 아니라, 특정 지역·특정 성별·특정 근무형태에 집중된 소득 기회의 소멸이다. 기사는 업종별 구체적 수치(예: 의류·잡화 비중 변화)를 별도로 제시하지 않는다 — 이 부분은 확인되지 않음이다.
잉글랜드 스토크온트렌트 튠스톨 하이스트리트, 셔터가 내려진 상점들 — Jonathan Hutchins, CC BY-SA 2.0 (Geograph via Wikimedia Commons)
런던만 달랐다 — 11% 감소와 16% 증가
지역 격차는 숫자로만 봐도 선명하다. 북동부·이스트미들랜즈는 11% 감소, 런던은 16% 증가. 같은 나라, 같은 시기, 같은 업종인데 방향이 반대다. 런던은 관광객과 직장인 수요가 집중되고, 온라인 사업자와 물류 거점도 몰렸다. 반대로 인구가 적고 구매력이 낮은 지역은 매장이 먼저 철수하고, 철수한 매장은 다시 손님을 불러들이지 못한다.
여기서 흔히 하는 해석이 "온라인 때문에 가게가 망했다"인데, 이 기사가 제시하는 요인은 더 복합적이다. 온라인 쇼핑 확산 + 높은 비즈니스 레이트 + 실질소득 압박. 세 요인이 겹친 곳에서 먼저 무너졌고, 그중 하나(수요·인구)가 버텨 준 곳은 숫자가 플러스로 남았다.
반전 — '상권 몰락'이 아니라 '일자리의 형태 전환'
RSA 보고서는 여기서 한 번 방향을 튼다. 하이스트리트의 쇠퇴를 되돌릴 수 있다는 것이다. 방법은 경험형(experiential) 쇼핑이다. 물건만 사러 온다면 온라인과 가격으로 못 이기지만, 매장에서만 가능한 경험을 붙이면 사람이 온다는 논리다.
보고서는 점원이 단순 판매원이 아니라 '매장 안 인플루언서(in-store influencer)'가 되어야 한다고 제안한다. 컨시어지와 스타일리스트 역할을 겸하거나, 슈퍼마켓 직원이 영양 상담·조리 시연을 맡는 식이다. 사례로 중국 베이징의 레고 스토어가 언급된다 — 장난감 매장이라기보다 테마파크 같은 공간이라는 평가다. 가상현실로 레고 세계에 들어가거나 자신이 레고 캐릭터가 된 모습을 보는 체험이 매장에 붙어 있다.
다만 이 처방은 일자리 종류의 변화를 전제로 한다. 계산·진열형 파트타임 자리가 줄고, 교육·상담·서비스형 자리가 늘어난다면, 그 자리가 기존 여성 점원에게 돌아갈지는 별개의 문제다. 보고서는 새 일자리가 '생길 수 있다'고 말하지만, 누가 그 자리를 차지할지는 기사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이것이 이 기사의 가장 큰 빈칸이다.
누구의 책임인가 — 기사에 담긴 네 개의 목소리
이 기사는 이해관계가 다른 네 목소리를 나란히 놓는다. ① 연구자(RSA) — 원인은 기술·소비 변화, 해법은 경험형 매장. ② 영국소매협회(BRC) 대표 헬렌 디킨슨(Helen Dickinson) — "일자리 감소가 여성과 덜 부유한 지역에 집중된 것은 유감"이라며 비즈니스 레이트 제도 개혁을 정부에 요구. ③ 청년여성신탁 — 직업 구조와 돌봄 부담이라는 사회적 조건을 지적. ④ 당시 하이스트리트 담당 장관 제이크 베리(Jake Berry) — 10억 파운드 규모의 '퓨처 하이스트리트 펀드(Future High Streets Fund)'와 비즈니스 레이트 지원(일부 소매업체 3분의 1 감면, 약 10억 파운드 상당, 총 지원 130억 파운드 초과)을 강조.
사료의 한계를 짚자면, 첫째 이 기사는 2019년 9월 시점의 보도다. 코로나19 이전의 숫자이며 이후 추세는 별도 확인이 필요하다. 둘째, 70%라는 수치는 RSA의 분석이지 정부 공식 통계가 아니고, 기사는 원자료나 산출 방식을 제시하지 않는다. 셋째, 정부 측 입장은 장관의 발언 한 단락으로만 담겨 있어 정책 효과에 대한 검증은 없다. 넷째, 업종별·연령별 세부 수치는 기사에 없어 확인되지 않음이다.
한국과 겹치는 곳 — 지방 중소도시 상가
한국에도 같은 모양의 자리가 있다. 지방 중소도시 중심 상가(소위 '구도심 상권')는 대형마트·온라인 쇼핑·인구 유출로 임차 수요가 빠졌고, 그 자리에서 일하던 것은 대부분 여성 점원·판매직이었다. 겹치는 것은 원인(이커머스, 수요 감소)과 누가 먼저 떠나는가(간헐적·파트타임 근로자)다.
다른 것은 제도다. 한국은 임차인이 보증금과 권리금을 얹어 나가고, 재계약 권리와 권리금 회수 기회가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으로 일정 부분 보장된다. 영국은 장기 계약과 임대료 재산정, 비즈니스 레이트라는 축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즉 두 나라 모두 '가게가 닫히는' 현상은 같지만, 손실이 임대인·임차인·지자체 중 누구에게 배분되는지가 다르다. 이 차이가 폐업 이후 회복 속도를 가르는지, 두 나라를 비교한 연구가 있는지는 이 기사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그래서 독자에게 묻는다
2011년부터 2018년 사이 영국에서 사라진 10만 8천 개의 일자리 중 7만여 개가 여성의 자리였다. 그 자리를 대신한 창고·배송 일자리는 다른 동네, 다른 성별에 돌아갔다. 우리 동네 상가에서도 어떤 가게가 문을 닫으면, 그 안에서 일하던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당신이 사는 지역에서 최근에 닫은 가게는,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왔는가?
사진: 잉글랜드 스토크온트렌트의 튠스톨(Tunstall) 하이스트리트, 셔터 내린 상점들 — Jonathan Hutchins, CC BY-SA 2.0 (Geograph via Wikimedia Commons)
참고 자료
· 'Women hit hardest by High Street job losses' — BBC News, 2019년 9월 11일 — https://www.bbc.com/news/business-49663395
· 원 보고서: Royal Society of the Arts (RSA), 2011–2018년 소매업 고용 변화 분석 (기사에서 인용된 범위)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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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1.06 13:27
런던은 16% 늘고 북동부는 11% 줄었다는 대목에서 읽기를 멈췄습니다. 같은 숫자가 지역 따라 부호가 뒤집히면 전국 평균은 별 의미가 없군요.
모든 이야기2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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