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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모든 이야기

1872년 12월 4일 오후 1시, 대서양 북위 38도 20분·서경 17도 15분. 아조레스 제도와 포르투갈 해안의 중간쯤에서 캐나다 상선 디 그라티아호의 키잡이가 수평선 쪽을 가리켰다. 약 9.7km 떨어진 곳에서 돛을 절반만 올린 범선 하나가 좌우로 흔들리며 이쪽으로 흘러오고 있었다. 선장 데이비드 모어하우스가 신호기를 보냈지만 응답이 없었다. 배가 가까워졌을 때, 갑판 위에는 사람이 한 명도 서 있지 않았다. 일등 항해사 올리버 드보와 이등 항해사 존 라이트가 보트를 내려 올라간 배의 고물에는 ‘메리 셀러스트(Mary Celeste)’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발견 당시의 배 — 사람만 빠진 채로 온전했다

드보가 본 것은 난파선이 아니라 버려진 배였다. 돛은 일부만 펼쳐진 채 상태가 나빴고 일부는 아예 없었으며, 삭구(돛대와 밧줄)는 여러 곳이 손상돼 밧줄이 뱃전으로 늘어져 있었다. 메인 해치 덮개는 단단히 닫혀 있었지만 앞쪽 해치와 저장고 해치는 열려 있었고 덮개는 갑판 위에 놓여 있었다. 배에 하나뿐이던 구명정(작은 요울 yawl)은 사라졌다. 나침반을 넣어 두는 비나클은 제자리에서 밀려나 유리 덮개가 깨져 있었다.

화물은 1,701배럴의 알코올 원액이었고, 나중에 확인된 바로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선장과 선원들의 사물함과 개인 물품도 손대지 않은 상태였다. 선창에는 물이 약 1.1m 차 있었는데, 이 정도 배라면 놀랄 양은 아니었고 항해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수심을 재던 임시 사운딩 로드는 갑판에 던져진 채 발견됐다. 연기는 없었고, 불탄 자국도, 총상도, 싸움의 흔적도 없었다. 배는 폭풍에 부서진 것도 아니고, 약탈당한 것도 아니었다.

발견 당시 메리 셀러스트호를 그린 당대 판화 — 저작자 미상,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남겨진 기록 — 항해일지의 마지막 줄

선실에서 찾은 항해일지의 마지막 기록은 사건 발견 9일 전인 1872년 11월 25일 오전 8시였다. 그 시점 배의 위치는 아조레스 제도의 산타 마리아 섬 앞바다, 북위 37도 1분·서경 25도 1분. 디 그라티아호가 배를 만난 지점에서 약 740km 떨어진 곳이다. 그러니까 배는 승무원 없이 최소 닷새에서 아흔 시간 남짓을 스스로 항해하며 서쪽으로 흘러간 셈이다. 선장의 항해 기구와 배의 서류 대부분은 사라졌고, 침대 밑에서는 칼집에 든 검이 발견됐다.

배에 탔던 사람은 모두 열 명이었다. 선장 벤저민 브리그스(37세), 그의 아내 세라 엘리자베스 코브, 그리고 1870년 10월에 태어난 두 살배기 딸 소피아. 일등 항해사 앨버트 리처드슨, 이등 항해사 앤드루 길링, 관리인 에드워드 헤드, 그리고 프리지아 제도 출신 독일인 선원 네 명(볼케르트·보즈 로렌첸 형제, 아리안 마르텐스, 고트리브 구드샬)이었다. 이 열 명 중 누구도 다시 목격되지 않았고, 시신 한 구도 발견되지 않았다.

주목할 점은 이 배가 ‘저주받은 배’로 유명해지기 전에는 평범한 상선이었다는 사실이다. 1861년 노바스코샤에서 아마존호로 진수된 뒤 1867년 케이프 브레턴 섬에서 폭풍에 좌초해 난파선으로 버려졌고, 뉴욕의 리처드 헤인스가 1,750달러에 사서 8,825달러를 들여 복원한 뒤 1869년 ‘메리 셀러스트’로 개명했다. 1872년 초에는 1만 달러를 들여 대수리를 했고, 그 결과 198톤이던 배는 282톤으로 커졌다. 사라진 열 명은 이 개조된 배의 첫 항해에 올랐다.

왜 설명이 어려운가 — 세 가지 물리적 난점

첫째, 배를 버릴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승선한 이들은 경험이 많은 선장과 ‘평화롭고 일류’라는 평판을 받은 선원들이었고, 브리그스는 출항 전 어머니에게 ‘우리 배는 아름다운 상태’라고 썼다. 식량과 물은 넉넉했고 배는 항해 가능했다. 둘째, 탈출 수단이 구명정 하나뿐이었다는 점이다. 길이 31m짜리 배의 승무원 열 명이 탄 작은 요울 하나로 대서양 한복판을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는 계산이 남는다.

셋째, 그리고 가장 곤란한 점은 그 배가 스스로 740km를 항해했다는 사실이다. 무인 상태의 범선이 바람과 조류를 타고 흘러갔다는 것은 이론상 가능하지만, 돛이 일부 접힌 상태로 방향을 유지하며 그 거리를 갔다는 것은 당시 재판부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워했다. 지브롤터 법정의 검사 프레더릭 솔리-플러드는 ‘배가 그렇게 멀리서 버려졌다는 것을 도저히 믿을 수 없다’며 일등 항해사 드보가 위치를 속이고 일지를 조작했다고 의심했다.

가설 1 — 알코올 증기 폭발, 가장 유력하지만 흔적이 없다

가장 오래 살아남은 설명은 화물에서 새어 나온 알코올 증기가 원인이었다는 것이다. 1913년 2월 9일자 『뉴욕 월드』는 다공성 통에서 알코올이 스며 나와 가스가 발생했을 가능성을 지적했고, 브리그스의 사촌 올리버 코브는 선창에서 나는 웅웅거리는 소리와 폭발음 목격담을 근거로 이 설을 강하게 밀었다. 1910년 보험 감정사 아서 퍼트먼은 일지에 적힌 ‘불길한 진동과 작은 폭발음’ 기록을 근거로, 선원이 불붙은 등불이나 시가를 들고 선창에 내려갔다가 증기에 불이 붙었다는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해치 덮개가 평소와 다른 위치에 있었다는 점도 이 설명과 맞아떨어진다.

약점은 명백하다. 배에는 화재의 흔적이 전혀 없었다. 폭발이 있었다면 남아야 할 그을음도, 타 버린 목재도 없었다. 이 약점을 메우려는 실험이 2006년 영국 채널5 방송을 위해 화학자 안드레아 셀라에 의해 수행됐다. 그는 판지 상자로 통을 대신한 선창 모형에 부탄가스를 채워 폭발시켰고, 놀랍게도 모형 내부에는 화재 흔적이 남지 않았다. ‘압력파형 폭발’이라 불리는 현상으로, 화염파는 화려했지만 그 뒤의 공기는 상대적으로 차가웠고 그을음도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2026년 맨체스터대 화학자 두 명은 종이와 부탄 대신 목재와 에탄올로 모형을 다시 만들어 이 결론을 정교화했고, 흔적 없는 에탄올 증기 폭발이 승무원을 배 밖으로 내몰았을 수 있다고 결론지었다.

다만 이 실험은 ‘흔적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을 보인 것이지, 실제로 폭발이 있었다는 증거는 아니다. 폭발 뒤에도 배가 온전히 떠 있었고 화물 통이 그대로였다는 점은 여전히 설명을 요구한다. 배가 폭발 직전에 버려졌다면, 왜 열 명 전원이 그 작은 보트에 타고 본선과의 연결을 확실히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문도 남는다.

메리 셀러스트호 선장 벤저민 브리그스 — 저작자 미상,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가설 2 — 펌프 고장과 잘못된 수심 측정

드보가 갑판에서 사운딩 로드를 발견한 것에서 출발한 설명이다. 이 배는 알코올을 싣기 전에 석탄을 운반한 이력이 있었고, 석탄 가루는 펌프를 막기로 악명 높았다. 2007년 스미스소니언 채널 다큐멘터리는 펌프가 갑판에서 분해된 채 발견됐다는 점에 주목했다. 승무원이 펌프를 고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선창의 물이 실제보다 훨씬 많다고 착각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거친 바다에서 화물이 꽉 찬 선창의 물 높이를 눈으로 가늠할 방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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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크로노미터(정밀 시계) 고장설이 붙는다. 기구가 오차를 일으켜 브리그스가 산타 마리아 섬에 거의 다 왔다고 착각했고, 실제로는 190km 더 서쪽에 있었는데도 육지가 보이지 않자 위치 계산이 틀렸다고 판단해 배를 버렸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약점은 이것 역시 ‘그럴 수 있다’ 수준이라는 점이다. 펌프가 실제로 고장 났는지, 물이 얼마나 찼는지, 크로노미터가 얼마나 어긋났는지는 배가 발견된 뒤에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물 1.1m는 이 배 규모에서 위험 수준이 아니었다는 점도 이 가설을 약하게 만든다.

가설 3 — 해일·용오름·지진해일 같은 자연 현상

선창의 물과 너덜너덜해진 삭구를 한 번에 설명하는 후보다. 용오름이 배를 강타했다면 갑판에 물이 쏟아지고 돛과 밧줄이 찢어졌을 것이다. 저기압이 선창의 물을 펌프 쪽으로 밀어 올려 승무원이 침몰을 오판하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제기됐다. 지중해나 대서양에서 관측된 해저 지진에 따른 해일, 또는 안개 속에서 갑자기 나타난 빙산과의 조우설도 있다.

약점은 지리적·물리적 정합성이다. 이 위도까지 빙산이 흘러왔다면 다른 배들도 목격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이 없고, 전문가들은 가능성이 낮다고 본다. 무엇보다 이 배는 발견 당시 돛이 상당 부분 접혀 있었다. 폭풍이나 용오름을 피해 배를 버렸다면 그 전에 모든 돛을 펼쳐 바람을 최대한 받으려 했을 것인데, 오히려 돛을 줄인 상태였다는 점이 자연재해설과 어긋난다.

가설 4 — 범죄와 보험 사기, 그리고 그 가설을 무너뜨린 증거

지브롤터 법정은 처음부터 범죄를 전제했다. 선박 조사관 존 오스틴은 뱃머리 양쪽의 상처가 날카로운 도구로 낸 것이라 주장했고, 영국 해군 함장들은 난간의 얼룩과 도끼 자국을 근거로 이를 뒷받침했다. 플러드는 선원들이 술을 마시고 만취 상태에서 브리그스 가족과 장교들을 살해한 뒤 뱃머리를 잘라 충돌을 위장하고 도주했다는 결론을 1873년 1월 22일 런던 무역위원회에 보냈다. 1931년 『쿼털리 리뷰』는 디 그라티아호가 미리 기다렸다가 선장 일행을 유인해 죽였다는 설까지 실었다.

이 가설들은 법정에서 차례로 무너졌다. 칼과 난간의 얼룩은 과학 분석 결과 피가 아니었다. 미국 영사가 의뢰한 미국 해군 로버트 슈펠트 대령의 보고서는 뱃머리의 상처가 사람이 낸 것이 아니라 바닷물이 목재를 침식시킨 자연적 결과라고 결론지었다. 디 그라티아호는 메리 셀러스트호보다 8일 늦게 출항한 느린 배였으므로, 항로에서 앞서 나간 배를 추월할 수 없었다. 해적설도 설득력이 없다. 당시 모로코 앞바다에 리프족 해적이 활동했지만, 해적이라면 상당한 가치가 있는 선장과 선원들의 개인 소지품을 왜 그대로 두었겠는가.

보험 사기설은 더 결정적이다. 배가 과대 보험에 들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됐지만, 보험사들은 아무런 조사를 개시하지 않았다. 브리그스가 영구히 사라질 계획이었다면 왜 학령기 아들 아서를 집에 남겨 두었겠는가. 1925년 역사가 존 로크하트는 브리그스가 종교적 광기로 전원을 죽이고 자살했다는 설을 폈지만, 유족들과 만난 뒤 후속판에서 이를 철회하고 사과했다.

반전 — 가장 유명한 이야기는 소설이 만들었다

‘식탁에 따뜻한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는 이 사건의 대표 이미지는 사실이 아니다. 1883년 6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가 ‘모든 돛이 펼쳐져 있었고, 키는 묶여 있었고, 부엌에는 불이 타고 있었으며, 식사는 식지도 않은 채 놓여 있었다’고 썼는데, 이는 전부 지어낸 세부다. 1906년 잡지들은 배가 실제 위치에서 2,600km나 떨어진 케이프베르데 제도 근처에서 표류했다고 보도했고, 살아 있는 닭이 타고 있었다는 기록까지 붙였다.

결정적인 것은 1884년 1월 『코른힐 매거진』에 실린 25세 선박 외과의사 아서 코난 도일의 단편 「J. 하바쿠크 젭슨의 진술」이었다. 도일은 배 이름을 ‘마리 셀레스트(Marie Celeste)’로 바꾸고, 선장 이름을 J. W. 티브스로, 항해 시기를 1873년으로, 출발지를 보스턴으로 바꿨다. 이야기 속에서 광신도가 선원들을 사주해 선장을 살해하고 배를 서아프리카로 끌고 간다. 도일은 자신의 소설이 진실로 받아들여질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당시 지브롤터에 있던 미국 영사까지 이 이야기에 흥미를 느껴 사실 여부를 문의했을 정도였다. 오늘날 ‘마리 셀레스트’라는 잘못된 표기가 원래 이름보다 더 널리 쓰이는 것도 이 소설 탓이다.

사기극은 그 뒤에도 이어졌다. 1913년 『스트랜드 매거진』은 ‘생존자 아벨 포스다이크’의 증언이라며 수영대가 무너져 선원들이 익사하거나 상어에게 먹혔다고 보도했지만, 이름 철자와 딸의 나이, 선원 수를 모두 틀렸다. 1920년대 아일랜드 작가 로렌스 키팅은 ‘존 펨버턴의 생존담’이라는 정교한 문학적 사기극을 꾸며냈고, 1926년 『뉴욕 헤럴드 트리뷴』은 이를 진실로 보도했다. 1924년 『데일리 익스프레스』에 실린 선원 증언은 등록 명부에 존재하지도 않는 인물을 내세웠다. 거대 오징어설, 버뮤다 삼각지대설, 외계인 납치설까지 붙은 것은 이 모든 이야기가 쌓인 뒤의 일이다.

사료의 한계 — 우리가 아는 것은 재판 기록뿐

이 사건에 대한 1차 자료는 사실상 지브롤터 해사 재판 기록과 당시 신문 보도, 그리고 남은 편지들이다. 그런데 재판 자체가 중립적이지 않았다. 재판을 이끈 플러드는 역사가들에게 ‘오만함이 지능에 반비례하는 사람’으로 평가되는 인물이었고, 그는 처음부터 범죄를 확신한 채 증거를 골랐다. 목격자 진술도 완전하지 않다. 두 선장이 출항 전날 함께 식사했다는 유명한 일화는 사건 50년 뒤 모어하우스의 미망인이 한 기억에만 근거하며, 브리그스 가족이 그런 친분을 확인해 주지 않았다.

여기에 상업적 각색의 흔적이 겹친다. 1935년 할리우드 영화는 벨라 루고시를 미친 선원으로 등장시켰고, 2001년 클라이브 커슬러 탐사대가 아이티 로셸루아 암초에서 발견했다고 발표한 잔해는 연륜연대 분석 결과 1894년 이후까지 자라던 조지아산 목재로 밝혀지며 배의 잔해가 아님이 드러났다. 사건을 다룬 다큐멘터리조차 결론을 내지 못했다. 결국 ‘미스터리’의 상당 부분은 사료의 공백이 아니라, 그 공백을 채우려는 후대의 이야기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그래도 남는 것이 있다. 흔적 없는 폭발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이 실험으로 확인됐고, 펌프와 크로노미터라는 구체적 기계 결함이 후보로 남았다. 즉 ‘설명 불가’가 아니라 ‘증거 부족’이다. 이 사건은 1872년의 사건이 아니라, 단서가 사라진 뒤에도 사람들이 같은 장면을 계속 다시 상상한다는 사실 자체로 남아 있다. 메리 셀러스트호는 그 뒤로도 계속 항해했고, 1885년 1월 선장 길먼 파커가 보험 사기를 위해 아이티 앞바다 암초에 일부러 좌초시켰다. 배는 결국 사람의 손에 의해, 그것도 사기극 속에서 끝났다.

독자에게

열 명이 구명정 하나에 타고 본선과의 밧줄을 놓친 뒤 벌어졌을 일을 상상해 보자. 만약 그 밧줄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배는 오늘도 ‘유령선’이 아니라 그냥 사고를 겪은 배로 기억됐을지도 모른다. 이 사건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초자연적인 무언가가 아니라, 사소한 매듭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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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라면 이 사건을 ‘해결된 미제’라고 부르겠는가, ‘설명되지 않은 사고’라고 부르겠는가. 그리고 이 배에 대해 처음 들었던 이야기 중, 지금은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진 것은 몇 개나 되던가.

참고 자료

  • 위키백과 「메리 셀러스트호 사건」 — https://ko.wikipedia.org/wiki/메리_셀러스트호
  • Wikipedia, “Mary Celeste” — https://en.wikipedia.org/wiki/Mary_Celeste
  • Wikipedia, “J. Habakuk Jephson's Statement” — https://en.wikipedia.org/wiki/J._Habakuk_Jephson's_Statement
  • 1차 자료: 지브롤터 해사법원 구난 청문 기록(1872년 12월 17일~1873년 2월), 프레더릭 솔리-플러드의 1873년 1월 22일자 런던 무역위원회 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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