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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UNITY모든 이야기

1955년 11월 10일, 수바(Suva)에서 푸나푸티(Funafuti)로 향하던 상선 투발루(Tuvalu)의 선장 제럴드 더글러스가 바누아레부 섬 북쪽 해상에서 낯선 배 한 척을 발견했다. 길이 69피트(약 21m)의 목조선이 왼쪽으로 심하게 기울어 좌현 난간이 거의 물에 잠긴 채 표류하고 있었다. 배 이름은 조이타(Joyita). 5주 전인 그해 10월 3일 새벽 5시쯤 사모아 아피아 항을 떠나 토켈라우 제도를 향했던 배였고, 승객 9명과 선원 16명, 모두 25명이 타고 있었다. 발견 당시 배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조타실의 전기 시계는 10시 25분에 멈춰 있었고, 선내 조명과 항해등 스위치는 켜진 상태였다.

발견 당시의 선내 —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졌나

복구반이 기록한 목록은 이 사건의 성격을 가장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배는 반쯤 침수되고 상부 구조물 일부가 파손되어 있었으며, 조타실 위의 플라잉 브리지가 떨어져 나가 있었다. 화물 4톤이 사라졌다. 항해일지, 육분의, 기계식 크로노미터 같은 항해 장비와 선장 토머스 밀러가 배에 두던 총기도 없었다. 함께 실려 있던 소형 보트 1척과 카를리 구명뗏목 3개도 모두 사라졌다. 반면 구명조끼는 전원이 쓸 만큼 충분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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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11월 표류 중이던 MV 조이타. 복구반원들이 기울어진 선체에 올라가 있는 모습 — 사진가 미상, 퍼블릭 도메인 (위키미디어 공용)

엔진실에서는 이상한 흔적이 나왔다. 우현 엔진 위에는 매트리스가 덮여 있었고, 좌현 엔진은 클러치가 분해된 채였다. 출항 전부터 고장 나 있던 쪽이 바로 그 좌현 엔진이다. 즉 배는 발견될 때까지도 단 한 개의 엔진으로 움직이던 상태였다. 보조 펌프는 엔진들 사이에 나무판을 걸쳐 얹혀 있었지만 호스는 연결되지 않았다. 갑판에서는 의사 가방이 발견되었는데, 청진기와 메스, 그리고 피가 묻은 붕대 네 개가 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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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타 조타실에서 키를 잡은 선원. 발견 당시 조타실은 비어 있었다 — 사진가 미상, 퍼블릭 도메인 (위키미디어 공용)

무선기가 향한 2182kHz — 가장 흔한 오해

이 사건은 흔히 "조난 주파수에 맞춰진 무선기"로 회자된다. 실제로 복구반은 무선기가 국제 해상 조난 주파수 2182kHz에 맞춰져 있는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그 직후 장비를 점검한 결과, 안테나와 송신기를 잇는 케이블에 끊어진 곳이 있었고 그 부위는 페인트로 덮여 있어 겉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이 때문에 무선기의 실제 송신 가능 거리는 약 2마일(3.2km)로 줄어 있었다.

즉 무선기가 조난 주파수에 맞춰져 있었던 것은 "누군가 구조를 요청하려 했다"는 증거가 아니라, 배가 구조 요청을 할 수 없었다는 증거에 가깝다. 출발 다음 날인 10월 4일 토켈라우에서 조이타는 정시 도착 예정이었고, 10월 6일 파카오포 항에서 미도착 보고가 나왔다. 그러나 25명이 탄 배를 두고 어떤 선박도, 어떤 육상국도 조난 신호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이 끊어진 케이블과 정확히 맞물린다.

왜 그들은 배를 떠났을까 — 난점 정리

조사위원회는 침수 원인만은 비교적 분명하게 설명했다. 좌현 보조 엔진 냉각 회로의 원수(海水) 배관이 전식(galvanic corrosion)으로 파열되어 빌지로 물이 들어왔고, 빌지 펌프에는 여과망이 없어 잔해가 막혀 있었다. 조이타에는 방수 격벽도, 선저 구획도 없었다. 물이 엔진실 마루를 넘어설 때쯤이면 선원이 누수를 찾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그 결과 남은 엔진 하나로는 조타에 필요한 속도를 낼 수 없었고, 배는 큰 너울에 옆면을 맞으며 좌현으로 기울었다.

난점은 여기서부터다. 조이타는 선체가 견고했고, 화물칸을 덮은 640세제곱피트(약 18m³)의 코르크 단열재와 화물로 실린 빈 기름통 200리터 80개 덕분에 일반 배라면 가라앉았을 수준으로 침수되고도 떠 있었다. 수바에 예인된 뒤 물을 빼내자 안정적으로 균형을 되찾았고, 예인도 수월했다. 배가 거의 가라앉지 않는다는 것을 가장 잘 알던 사람은 20년 가까이 이 배를 다뤄온 선장 밀러였다. 그런 사람이 왜 배를 버렸는가. 조사위원회가 특히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이것이었다.

가설 1 — 선장의 부상, 그리고 통제 상실

피 묻은 붕대와 갑판 위의 의사 가방은 무언가 부상이 있었다는 신호로 읽힌다. 마침 이 배에는 절단 수술을 하러 가던 의사 앨프레드 파슨스가 타고 있었다. 선장 밀러가 다치거나 무력해졌다면, 배가 침수된다는 사실을 모르는 나머지 사람들이 구명뗏목으로 몰렸을 수 있다. 밀러의 지인인 선장 S. B. 브라운은 밀러가 선체 구조를 알기에 살아서 배를 떠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했고, 밀러와 미국인 일등항해사 척 심슨 사이의 긴장이 폭력으로 번졌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약점은 두 가지다. 첫째, 의사 가방이 왜 갑판에 놓여 있었는지, 붕대의 피가 누구의 것인지 아무도 확인하지 못했다. 1956년 2월 아피아에서 열린 조사위원회는 이 가방에 대해 보고서에서 아예 언급하지 않았다. 둘째, 부상 가설만으로는 사라진 항해 장비와 4톤의 화물을 설명하기 어렵다. 부상당한 사람을 태우고 떠나면서 굳이 크로노미터와 일지를 챙길 이유가 분명하지 않다.

가설 2 — 반란과 뗏목 탈출

1962년 조이타를 사들인 영국 작가 로빈 모옴은 『조이타 미스터리』에서 이 사건을 가장 구체적으로 재구성했다. 그에 따르면 매트리스는 누수를 막기 위해, 혹은 불어난 물이 플라이휠에 맞아 튀는 물로부터 배전반을 가리기 위해 쓰였다. 밀러는 배가 가라앉지 않는다는 확신과 채무 청산에 대한 조바심 때문에 계속 나아가려 했고, 심슨과 선원들이 회항을 요구하면서 충돌이 빚어졌다. 결국 심슨이 조타권을 잡고 항해 장비, 일지, 식량, 그리고 부상한 밀러를 데리고 배를 떠났다는 것이다. 모옴은 이들이 근처 섬이나 암초를 보고 뗏목을 띄웠지만, 시속 64km에 이르는 강풍과 높은 파도에 밀려 바다로 나가버렸다고 보았다.

이 설명은 사라진 물품 목록과 잘 맞는다. 그러나 약점도 명확하다. 반란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 없고, 심슨이 왜 침수되었지만 떠 있는 배를 버리고 태평양 한복판에서 작은 뗏목에 몸을 실었는지에 대한 근거가 모옴의 추론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게다가 1962년의 책은 신문 특종과 증언을 재구성한 저널리즘에 가깝고, 조사위원회의 공식 결론을 뒤집은 것은 아니었다.

가설 3 — 일본 어선, 소련 잠수함, 해적

사건 직후의 설명들은 훨씬 거칠었다. 피지의 『타임스 앤드 헤럴드』는 ‘믿을 만한 소식통’을 인용해 조이타가 일본 어선단을 지나쳤고 ‘일본이 보이게 하고 싶지 않은 무언가’를 목격했다고 보도했다. 런던의 『데일리 텔레그램』은 태평양 외딴섬 기지에서 활동하는 전후 잔존 일본군이 원인이라는 가설을 실었다. 실제로 배를 정리하던 사람들이 ‘Made in Japan’ 도장이 찍힌 칼을 발견하면서 이 이야기는 힘을 얻었지만, 칼에 대한 검사 결과는 음성이었고, 그것은 1940년대 후반 이 배가 어선으로 쓰일 때부터 있던 낡고 부러진 물건이었다.

소련 잠수함에 의한 납치, 램(ram) 공격, 근대 해적에 의한 25명 살해와 4톤 화물 탈취 같은 가설도 회자되었다. 특히 보험 사기 가설의 약점은 더 분명하다. 밀러에게 채무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배의 해수 밸브가 열려 있지 않았고 이 배를 고의로 침몰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또한 그가 벌이려던 정기 운항은 사모아 정부의 용선 계약이었으므로, 배를 잃으면 빚을 조금도 줄일 수 없었다.

공식 결론 — "원인 불명"이라는 정확한 의미

1956년 2월 아피아의 해사 조사위원회는 배의 상태가 매우 열악했다고 판정했다. 밀러 선장에 대해서는 엔진 하나로 외해 항해를 강행한 데 대한 무모함, 작동하는 무선기와 제대로 갖춘 구명정 없이 출항한 데 대한 태만, 유료 승객 운송 면허가 만료된 상태로 승객을 태운 법규 위반을 지적했다. 그러나 승객과 선원의 행방에 대해서는 ‘제출된 증거로는 설명할 수 없다(inexplicable on the evidence submitted at the inquiry)’고 결론지었다.

이 문장을 읽을 때 중요한 것은 구분이다. 조사위원회가 침수 원인을 밝히지 못한 것이 아니다. 침수 원인은 파열된 배관과 막힌 펌프, 격벽 부재로 설명되었다. 설명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왜 배를 떠났는가, 그리고 그 뒤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가다. 2012년 기준으로 이 25명은 모두 여전히 ‘실종’으로 남아 있었고, 그해 사모아와 토켈라우에서 기념 사업이 추진되면서 사망 선고를 공식화해 달라는 요청이 나왔다. 사건은 해결되지 않은 두 개의 빈칸을 안고 있다.

사료의 한계 — 기록과 각색 사이

이 사건의 1차 자료는 얇다. 결정적인 것은 1956년 조사위원회 기록과 복구반의 현장 확인이지만, 그 기록조차 갑판에 놓인 의사 가방에 관해 아무 말도 남기지 않았다. 시계가 10시 25분에 멈췄다는 유명한 사실은 배의 발전기가 꺼진 시각을 보여줄 뿐, 그날 밤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사라진 일지가 있었다는 것 자체가 무슨 내용이 적혀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후대의 이야기도 사료와 섞여 있다. ‘메리 셀레스트의 남태평양판’이라는 별명, 일본군에 의한 납치, 심슨의 반란, 25명이 뗏목을 타고 섬에 닿았다는 결말은 모두 사후에 만들어진 각색이다. 1975년 서사모아 우체국이 이 사건을 소재로 5종의 기념우표를 발행한 것은 사건이 상품이 된 대표적 사례다. 배 자체도 1956년 경매로 팔린 뒤 1957년 좌초, 1959년 다시 좌초와 펌프 밸브 설치 오류를 거쳐 난파선이 되었고, 1960년대 말 유물로 팔린 뒤 1970년대에 조각조각 사라졌다. 기록과 전설이 한꺼번에 늘어나는 동안, 배는 남아 있지 않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 — 배를 떠나는 결정

조이타가 계속 회자되는 이유는 25명의 사라짐 자체보다, 그들이 내린 결정이 이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안전한 배를 버리고 태평양의 뗏목을 택하는 판단은 우리가 위기 상황을 어떻게 읽는지에 대한 질문으로 곧장 이어진다. 밀러는 배의 물리적 버팀목을 알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물이 차오르는 엔진실을 보았다. 같은 배에 타고도 서로 다른 사실을 믿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건은 또한 안전 규정이 무엇을 막는 장치인지 보여준다. 여과망 없는 빌지 펌프, 방수 격벽 없는 선저, 2마일짜리 무선기, 부족한 구명조끼, 만료된 승객 운송 면허는 각각 사소해 보이지만 한꺼번에 겹치면서 사람이 남을 수 있는 근거를 하나씩 지웠다. 원인 불명이라는 결론은 불가사의라서가 아니라, 남아야 할 기록이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

여러분이라면 침수되는 배 위에서, 선장이 그 배는 가라앉지 않는다고 말할 때 그 말을 믿겠는가, 아니면 발밑의 물을 믿겠는가. 그리고 이 사건에서 우리가 오늘 회복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 사라진 승객들의 행방일까, 아니면 그들보다 먼저 침몰했어야 할 안전 기준일까.

참고 자료

  • 위키백과, "MV Joyita" — https://en.wikipedia.org/wiki/MV_Joyita (사건 개요, 선박 연혁, 조사위원회 결론, 주요 가설 수록)
  • Robin Maugham, The Joyita Mystery (London: Max Parrish & Co, 1962) — 조이타를 매입한 저자의 사건 재구성
  • David G. Wright, Joyita: Solving the Mystery (Auckland University Press, 2002) — 선체와 침수 원인에 대한 전문적 해석
  • John Harris, Without Trace: the Last Voyages of Eight Ships (London: Methuen, 1981) — 1차 조사 기록 요약
  • 이미지: 위키미디어 공용 "MV Joyita 1955.jpg", "Chief Body at the wheel of the Joyita.jpg" — 사진가 미상, 퍼블릭 도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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