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을 지을 땅을 고르는 절차에서, 애초에 후보가 될 수 없는 지역의 기준이 2026년 10월 30일 확정됐다. 고준위방사성폐기물관리위원회(위원장 김현권)가 제9차 회의에서 의결한 것은 단층·지진·화산·석회암 등 6개 배제기준과 조건부 6개, 합계 12개 항목이다. 숫자로 보면 활동성 단층에서 8km, 리히터규모 5.5 초과 지진에서 8km다. 이 기준이 지도 위에 그려지면 전국 지자체 절반 이상이 첫 관문에서 빠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번 결정은 “어디에 지을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에는 지을 수 없는가”를 먼저 정하는 단계다. 순서를 바꾼 것 자체가 이 정책의 성격을 말해 준다.
지금 왜 이 기준이 나왔나
배경은 2026년 4월에 세워진 부지적합성 조사계획이다. 고준위 특별법에 따라 관리시설 부지 선정은 조사계획 수립 → 부적합지역 배제 → 기본조사 대상부지 공모 → 기본조사 → 심층조사 → 주민투표와 위원회 의결 순으로 진행된다. 이번 안건은 그 두 번째 칸을 채운 것이다.
위원회는 2026년 8~10월 세 차례 회의와 전문위원회 9~10월 네 차례 검토를 거쳐 12개 기준을 도출했다고 밝혔다. 기준을 먼저 공개하면 지자체가 “왜 우리만 빠지나”라는 의문을 제기할 여지가 줄고, 동시에 공모에 나설 수 있는 지역의 범위가 미리 좁혀진다. 부지 선정이 정치적 분쟁으로 번지는 것을 막으려는 설계로 읽힌다.
배제기준 6개: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땅
첫째, 활동성 단층 8km 이내 지역이다. 원자력안전위원회 고시인 사용후핵연료 중간저장시설 위치 기술기준이 8km를 규정하고 있다. 미래에 단층 운동이 일어날 수 있는 구조여서 암반 균열과 지반 변형, 지진 발생 가능성이 있는 곳이다.
둘째, 리히터규모 5.5를 넘는 지진이 8km 이내에서 발생한 지역이다. 원자로 운전정지 기준(0.1G, 규모 약 6.0에 해당)과 활동성 단층의 영향 범위 8km를 함께 고려한 수치다. 셋째는 화산활동 지역이다. 지표면이 변형되면 지반 균열과 투수성 변화로 방사성 핵종이 이동할 가능성이 커진다.
넷째, 석회암 등 불안정 암종 분포지역이다. 석회암은 지하수와 화학반응을 일으켜 싱크홀과 침식을 만드는 암종이다. 다섯째, 광산·지하수·온천 등 천연 지하자원 분포지역이다. 나중에 사람이 굴착할 가능성이 높아 외부 격리에 부적합하다는 이유다.
여섯째는 경주시다. 이미 중·저준위 방폐장이 있는 곳으로, 고준위 특별법 제21조 제1항이 부지적합성 조사 대상에서 제외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물리적 조건이 아니라 법이 정한 예외라는 점이 눈에 띈다.
조건부 배제기준 6개: 노력으로 풀리는 땅
나머지 6개는 “행정적으로 해소할 수 있으면 신청 가능”이라는 조건이 붙는다. 해안선에 접하지 않은 내륙지역이 대표적이다. 해안가 원전에서 고준위 폐기물을 옮기려면 해상 운반이 유리하기 때문인데, 운반 경로상 해안 인접 지자체와 협의를 거치면 신청할 수 있다.
항공기 추락이나 군사활동 영향지역(공항·포사격장 인근)은 원자력안전법에 따라 원안위 영향평가 등 관계기관 협의가 필요하다. 개발행위허가 제한지역은 국토계획법상 지하수 개발과 굴착·시추가 모두 막혀 조사 자체가 불가능한 개발제한구역을 가리킨다.
토지 일시사용 불가지역(산지전용·일시사용제한지역, 철도시설 지역), 토지 형질변경 불가지역(해양보호구역, 야생생물 특별보호구역 등), 조사 지연 우려지역(세계문화유산 구역, 상수원보호구역)도 같은 범주다. 앞의 두 개는 조사 장비를 들일 수 없다는 뜻이고, 마지막은 들어갈 수는 있어도 허가 협의에 시간이 걸린다는 뜻이다.
정책브리핑(korea.kr) 화면 캡처 — 문화체육관광부 정책브리핑에 게시된 고준위방사성폐기물관리위원회 보도자료(2026.10.30.)
누가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나
한국원자력환경공단은 일정을 얻는다. 올해 말까지 문헌조사와 현장확인으로 배제 작업을 끝내고 기본조사 후보부지 지도 데이터를 공개해야 한다는 과제가 명확해졌다. 반대로 후보부지가 될 수 있는 지자체는 선택의 압박을 받는다. 내년 1분기 공모에 응하지 않으면 이후 지원금 협상 테이블에서 빠지기 때문이다.
주민 입장에서 당장 얻는 것은 정보 접근권이다. 후보부지 지도가 공개되면 자기 지역이 왜 빠졌는지, 왜 남았는지 확인할 수 있다. 잃는 것은 시간이다. 기본조사 1~2년, 심층조사 3~5년, 부지 선정 3~4년이 걸리고 주민투표는 그 끝에 있다. 정부는 부지적합성 조사 대상지역에 관계부처 협의를 거쳐 일정 규모의 지원금을 주고, 유치·주변지역에는 내년 공모 때 특별지원금과 반입수수료의 잠정 규모를 제시하겠다고 밝혔다. 다만 최종 지원 규모는 심층조사 대상부지가 정해진 뒤 국무총리 주재 유치지역 지원위원회에서 결정된다.
통념과 다른 지점: 배제가 곧 안전 보증은 아니다
“12개 기준을 통과하면 안전한 땅”이라는 해석은 원문에 없다. 이 기준은 조사할 가치가 있는지 거르는 1차 필터일 뿐이고, 실제 적합성은 기본조사와 심층조사에서 판정된다. 조건부 기준이라는 장치도 흥미롭다. 해안 미인접 지역처럼 “지금은 안 되지만 협의하면 된다”는 항목을 남겨 두면, 지자체가 스스로 법령 개선과 협의를 끌어내야 하는 구조가 된다. 배제를 행정적 유인이자 협상 도구로 쓴 셈이다.
또 하나, 이번 결정에서 가장 강한 기준 중 하나인 경주 제외는 과학이 아니라 법 조항에서 나왔다. 같은 법이 나중에 바뀌면 지도도 바뀔 수 있다는 뜻이다.
해결하지 못하는 것
이 기준은 주민 수용性问题를 풀지 않는다. 배제기준을 통과한 지역이 곧 수용하는 지역은 아니며, 공모 절차의 평가 기준과 선정 방법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아 전문위원회 검토를 거쳐야 한다. 지원금의 최종 규모도 정해지지 않았고, 반대편 시각(시설 유치를 거부하는 주민단체, 지역 정치권의 반발)은 이 보도자료에 담겨 있지 않다.
운반 문제도 남는다. 해상 운반을 전제로 내륙을 조건부 배제했지만, 해안 인접 지역을 통과하는 육상 구간의 주민 동의 절차는 이번 안건에서 다뤄지지 않았다. 어떤 기준에도 걸리지 않는 “안전하지만 아무도 원하지 않는 땅”을 어떻게 설득할지는 여전히 미정이다.
독자가 확인해야 할 것
거주 지자체가 후보부지가 될 수 있는지 궁금하다면 연말까지 공개될 예정인 기본조사 후보부지 GIS 지도 데이터를 확인하면 된다. 공단이 문헌조사와 현장확인 후 공개한다. 시·군·구 담당자라면 내년 1분기 공모 일정과 신청 요건을 미리 챙겨야 하고, 조건부 기준에 해당하는 지역은 해안 인접 지자체나 관계기관과의 협의를 먼저 시작해야 한다.
주민이라면 지원금 규모가 공모 단계에서는 잠정치에 불과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확정은 심층조사 이후다.
사료의 한계
이 글은 정부가 배포한 보도자료 한 건을 바탕으로 썼다. 보도자료는 정부의 입장과 계획을 정리한 문서이므로, 기준 설정의 과학적 근거에 대한 외부 전문가의 반론, 배제기준에서 빠진 항목에 대한 지적, 유치 반대 측의 주장은 포함되어 있지 않다. 지원 규모와 공모 세부안은 “계획”으로 표기된 단계이며 확정된 사실이 아니다.
참고 자료
고준위방사성폐기물관리위원회, 「고준위위원회, 고준위 방사성폐기물 관리시설 부적합지역 배제기준 확정」, 2026년 10월 30일. 정책브리핑: korea.kr 보도자료 원문
여러분은 이런 시설이 우리 동네 후보지가 될 수 있다면, 어떤 조건을 먼저 확인하시겠습니까?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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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1.01 04:08
경주가 빠진 이유가 과학이 아니라 특별법 조항이라는 대목에서 좀 멈칫했습니다. 이미 시설을 떠안은 지역은 다시 후보가 될 수 없다는 건 당연해 보이면서도, 법이 바뀌면 지도도 같이 바뀔 수 있다는 말은 묘하게 걸리네요. 저는 지진 기준 8km 얘기를 보면서 그 반경 안에 사는 사람들 입장이 궁금해졌습니다. 반경 밖이면 정말 안심해도 되는 건지, 아니면 조사 단계에서 또 걸러지는 건지. -
빗방울
2026.11.01 08:20
결국 지도에 남는 건 '괜찮은 땅'이 아니라 '아무도 이의 못 낸 땅'일지도.
모든 이야기1478
가벼운 안부부터 깊은 생각까지, 함께 나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