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그림은 1964년 11월 1일부터 7일까지 열린 미국 도서주간(Book Week) 홍보 포스터다. 세로로 긴 종이 한 장 위에 분홍빛 플라밍고 한 마리가 서 있고, 그 다리 사이에 가로로 팽팽하게 당겨진 두 개의 줄 — 그네 — 에 사람 하나 크기만 한 아이가 매달려 있다. 아이는 그네에 앉은 자세로 초록 표지의 책을 펼쳐 들었다. 인쇄물에는 제목과 발행 정보 외에 사진 한 장도, 배경 풍경도 없다.
화면을 채운 것은 새 한 마리다
구도는 지극히 단순하다. 전체 높이의 3분의 2를 플라밍고의 몸과 구부러진 목이 차지하고, 남은 아래쪽에 아이와 그네줄이 놓인다. 새의 목은 머리를 땅 쪽으로 내민 채 거의 원형에 가까운 곡선을 그리는데, 이 곡선이 화면의 다른 모든 요소를 감싸 안는 틀이 된다. 새의 다리는 사람 다리보다 훨씬 길고, 관절이 뒤로 꺾인 것처럼 보이도록 그렸다. 우측 상단 여백에는 나비 두 마리가 작게 떠 있다. 색은 분홍·초록·검정·아이보리, 네 가지로 끝난다. 회색 중간톤도, 그라데이션도 거의 쓰지 않았다.
누가, 무엇을 위해 만들었나
저작자는 브루노 무나리(Bruno Munari, 1907~1998)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난 디자이너이자 작가로, 20세기 이탈리아 디자인에서 미래주의와 구축주의를 거쳐 쓸모없는 기계(macchine inutili) 같은 실험을 거친 인물이다. 그가 1945년에 낸 『ABC』는 글자 대신 그림과 촉감으로 알파벳을 가르치는 어린이 책이었고, 이후에도 『어두운 밤의 책』, 『안개 속의 책』처럼 책 자체를 놀이 기구로 다루는 작업을 이어 갔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그런 작업 세계가 이 포스터의 문법과 그대로 겹친다.
1964년 미국 도서주간 포스터. 분홍 플라밍고가 그네줄에 매단 아이가 책을 펼치고 있다 — 브루노 무나리(Bruno Munari), 퍼블릭 도메인 (미국 의회도서관 Prints and Photographs Division, ppmsca.42987 / 위키미디어 공용)
발행 맥락은 미국 도서주간이다. 11월 1일부터 7일까지의 이 주간은 1919년부터 이어진 미국의 독서 진흥 캠페인으로, 매년 그해의 주제 포스터가 제작됐다. 이 이미지의 설명에는 「Swing into books. Book week, November 1-7, 1964.」라고만 적혀 있고, 누가 의뢰했는지, 어디에 붙였는지, 몇 부가 찍혔는지는 나오지 않는다. 원본은 미국 의회도서관의 인쇄물·사진부(Prints and Photographs Division)가 소장하며, 디지털 ID는 ppmsca.42987이다. 원판은 폭 6,989픽셀, 높이 9,143픽셀의 스캔 파일로 남아 있다.
왜 하필 플라밍고였나
여기서부터는 이미지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가 참조하는 대상에 대한 이야기다. 플라밍고는 실제로 아주 긴 다리와 목을 가진 새이고, 그 두 부위의 길이가 몸통에 비해 눈에 띄게 크다. 이런 체형은 얕은 물에서 서서 먹이를 찾는 생활 방식과 맞물린다. 다리가 길면 몸통을 물 밖에 두고도 깊은 곳까지 발이 닿고, 목이 길면 몸을 움직이지 않고 부리만 물속으로 내밀어 갑각류나 조류를 걸러 낼 수 있다. 그림에서 새가 머리를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자세는 그 먹이 찾기 동작을 연상시킨다.
플라밍고의 분홍색 역시 그림의 색 선택과 무관하지 않다. 이 색은 깃털에 원래 들어 있는 색소가 아니라, 먹이에서 얻는 카로티노이드 계열 색소가 몸에 쌓여 나타나는 결과다. 갓 태어난 새끼는 회색이나 흰색에 가깝고, 먹이에 따라 색이 짙어지거나 옅어진다. 즉 분홍 플라밍고라는 인상은 새의 고정된 속성이 아니라 사육 환경과 식단에 좌우되는 조건부 성질이다. 포스터가 그 색을 골랐다는 사실 자체가, 이 새를 책 읽는 사람의 대리물로 세우려는 선택이었다고 읽을 수 있다.
그네라는 장치의 반전
재미있는 지점은 그림의 물리다. 그네줄은 플라밍고의 다리 두 개에 각각 걸려 있는데, 새의 다리는 땅에 발을 딛고 서 있다. 그네의 무게는 결국 새의 다리를 통해 지면으로 전달된다. 그런데 화면에는 그 힘이 어떻게 버텨지는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줄이 다리에 묶인 매듭만 작게 표시되어 있을 뿐, 장력이 어느 정도인지, 다리가 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는 그려져 있지 않다. 이 포스터는 물리적으로 정합적인 장면을 그린 것이 아니라, 아이의 무게를 견디는 새라는 은유를 그린 것이다.
통념과 다른 지점이 여기 있다. 흔히 어린이 책 포스터는 아이가 책을 들고 앉아 있는 모습을 그린다. 이 포스터는 순서를 뒤집는다. 책이 아이를 지탱하는 것이 아니라, 새가 아이를 매달고 있고 아이가 책을 펼치고 있다. Swing into books라는 문구는 책 속으로 뛰어들다로 읽히지만, 그림에서는 이미 공중에 떠 있는 아이가 책을 펼침으로써 그네의 진폭을 유지한다. 읽기가 놀이의 조건이 아니라 놀이의 균형추로 배치된 셈이다.
오늘의 그림이 된 맥락
이 이미지가 오늘의 그림으로 선정된 이유에 대해서는 제공된 설명에 근거가 없다. 위키미디어 공용의 설명에는 「Swing into books. Book week, November 1-7, 1964.」라는 캡션과 의회도서관 소장 정보만 있고, 선정 사유나 편집자의 코멘트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다만 11월 4일이라는 날짜가 이 포스터가 홍보한 주간(11월 1~7일) 안에 들어 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선정 이유를 추정해 단정하지는 않겠다.
사료로서의 한계
이 스캔본이 보여주지 않는 것이 적지 않다. 첫째, 종이의 질감과 인쇄 방식은 알 수 없다. 석판인쇄였는지 실크스크린이었는지, 원본 크기가 몇 센티미터였는지는 이 디지털 파일에 담겨 있지 않다. 둘째, 이 포스터가 실제로 어디에 붙었는지, 얼마나 유통됐는지, 당시의 반응이 어땠는지는 이미지에서 읽어낼 수 없다. 셋째, 포스터의 색은 스캔과 색 보정을 거친 값이다. 분홍의 정확한 색조는 원판과 다를 수 있다.
또 하나 주의할 점은 이 이미지가 사진이 아니라 인쇄물을 찍은 재현물이라는 것이다. 화면에 보이는 여백, 가장자리의 미세한 결, 아래쪽 띠의 초록색은 인쇄된 종이의 상태이지 사진의 피사체가 아니다. 사료로 쓸 때는 1964년의 인쇄물이라는 층위와 2026년에 스캔된 디지털 파일이라는 층위를 구분해야 한다.
독자에게
이 포스터에서 아이는 책을 읽고 있지만, 정작 책장은 화면 어디에도 없다. 그네가 멈추면 아이는 어디로 갈까. 그리고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책에 매달린 기억은 언제였나.
참고 자료
- 원본 파일: Wikimedia Commons — Swing into books, Book week, November 1-7, 1964
- 소장: 미국 의회도서관 Prints and Photographs Division, digital ID ppmsca.42987
- 저작자: Bruno Munari
- 라이선스: 퍼블릭 도메인(Public domain)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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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1.04 07:42
무나리는 『ABC』에서도 글자를 그림으로 바꿔 버렸는데, 이 포스터의 초록 책은 그 연장선처럼 보인다. 책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책을 몸으로 다루는 놀이가 먼저 온다는 점이 흥미롭다. 4색으로 끝낸 팔레트도 아이 눈높이를 정확히 겨냥한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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