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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앞마당 동상에 새겨진 암호, 4개 중 1개가 남았다

빗방울 2026.11.06 01:59 12분 읽기 조회 22 · 추천 2

1990년 11월 3일, 버지니아주 랭글리에 있는 CIA 본부(조지 부시 정보 센터) 신관 앞마당에서 조각가 짐 샌본(Jim Sanborn)은 구리판 네 장을 공개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프린터에서 막 나온 종이처럼 S자로 말린 높은 구리 스크린이다. 그 왼쪽 면에는 알파벳 865자와 물음표 4개, 모두 869자가 뚫려 있고, 오른쪽 면에는 867자의 비제네르 암호표가 새겨져 있다. 조형물의 이름은 그리스어로 '숨겨진'을 뜻하는 크립토스(Kryptos)이고, 건립 비용은 1988년 기준 25만 달러였다. 샌본은 은퇴를 앞둔 CIA 직원 에드워드 셰이트(Edward Scheidt)와 함께 이 암호 체계를 설계했다. 셰이트는 난이도를 10점 만점에 9점 정도로 보았고, 5년에서 10년 안에 풀릴 것으로 기대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지금, 네 구간 가운데 세 구간은 풀렸고 네 번째 구간(K4)은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 이 글은 이 조형물을 괴담으로 소개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가 언제 무엇을 확인했고, 무엇이 아직 확인되지 않았는지를 순서대로 정리하려는 것이다.

확인된 사실: 무엇이 새겨져 있고 무엇이 해독되었나

첫 번째 구간은 'PALIMPSEST'(팰림프세스트)를 키로 한 비제네르 암호다. 평문은 "BETWEEN SUBTLE SHADING AND THE ABSENCE OF LIGHT LIES THE NUANCE OF IQLUSION"이다. IQLUSION은 ILLUSION의 오타인데, 샌본은 의도한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원본 코딩 차트를 보면 키워드 PALIMPSEST 자체가 PALIMPCEST로 잘못 적혀 있었고, 그 결과 K가 들어간 것이라는 분석도 있어, '의도'라는 설명이 곧바로 검증되는 것은 아니다.

두 번째 구간은 'ABSCISSA'를 키로 한다. 평문에는 지구 자기장으로 정보를 수집해 '지하'의 알 수 없는 장소로 송신했다는 문장, "DOES LANGLEY KNOW ABOUT THIS?", "WHO KNOWS THE EXACT LOCATION? ONLY WW", 그리고 북위 38도 57분 6.5초·서경 77도 8분 44초 좌표가 담겨 있다. WW는 당시 CIA 국장 윌리엄 웹스터로 해석된다. 세 번째 구간은 전위(transposition) 방식이며, 1922년 11월 26일 하워드 카터가 투탕카멘 무덤에 만든 작은 구멍에서 촛불을 들이대던 장면을 카터의 저서에서 옮긴 문장이다. "CAN YOU SEE ANYTHING Q ?"로 끝난다.

해독의 우선권이 세 번 뒤집힌 사건

먼저 해독한 사람은 공개적으로 밝힌 사람과 실제로 먼저 푼 사람이 다르다. NSA 팀은 켄 밀러와 데니스 맥대니얼 등이 이끌고 1992년 말에서 1993년 6월 사이에 세 구간을 풀었지만, 이 사실은 2013년 엘론카 두닌의 정보공개청구로 공개된 문서를 통해 확인되었다. CIA 분석가 데이비드 스타인은 1998년에 연필과 종이로 풀었으나 조직 내부에만 알려졌다. 1999년 캘리포니아의 컴퓨터 과학자 짐 길로글리가 컴퓨터로 풀어 공개하면서 그제야 앞선 두 해독이 세상에 드러났다.

이 일화가 중요한 이유는, 크립토스의 '미스터리'가 순수하게 암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누가 언제 아는가 하는 조직 문제가 해독의 역사에까지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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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본부 앞마당의 크립토스, 암호표와 구리 문자판 — 캐럴 M. 하이스미스, 퍼블릭 도메인 (미국 의회도서관, Wikimedia Commons)

K4는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 — 미해결 상태의 정확한 경계

네 번째 구간은 97자다. 지금까지 공개된 것은 방식에 대한 간접 증거와 부분 평문이다. 2016년 바우어·링크·몰레는 오른쪽 암호표 한 줄에 L이 하나 더 들어가 있어 오른쪽 열을 세로로 읽으면 HILL이 나온다는 점을 지적하며 K4에 힐 암호가 쓰였을 가능성을 논문으로 제시했다. 다만 이것은 가설이다.

결정적인 것은 샌본이 직접 준 힌트다. 2010년 11월, K4의 64~69번째 글자 "NYPVTT"가 'BERLIN'이 된다고 밝혔다. 2014년 11월 뉴욕타임스에 "MZFPK"(70~74번째)가 'CLOCK'이 된다고 했고, 74번째 글자 K는 평문과 암호문이 같다는 점도 공개했다. 2020년 1월에는 26~34번째 "QQPRNGKSS"가 'NORTHEAST', 8월에는 22~25번째 "FLRV"가 'EAST'라고 밝혔다. 이로써 K4의 중간 부분이 베를린의 동쪽 방향과 시계를 가리킨다는 사실은 사실상 확정됐고, 2025년 샌본은 그 시계가 베를린 세계시계(Weltzeituhr)임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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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립토스 소형 복제품. 화면에 Vigenère 암호표가 보인다 — Jim Sanborn,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왜 36년째 풀리지 않았는가 — 방법과 정보의 문제

물리적 난점은 짧은 길이다. K4는 97자이고, 이미 평문의 상당 부분이 힌트로 공개되어 있다. 현대의 고전 암호 해독은 보통 빈도 분석과 통계적 검증으로 접근하는데, 정답을 판별할 기준이 없으면 여러 가설이 동시에 성립한다. 실제로 수십 년 동안 K4 해법이 여러 번 발표되었으나, 힌트와 어긋나거나 다른 구간의 문장과 연결되지 않아 공식적으로 인정된 것은 없다.

여기에 제작자의 발언이 일관되지 않았다는 점이 겹친다. 샌본은 1990년 헌정식에서 당시 국장 웹스터에게 완전한 해법을 줬다고도 하고, 나중에는 전부는 주지 않았다고도 했다. 또 2005년 인터뷰에서는 자신이 죽은 뒤에도 정답을 검증할 방법을 마련해 두었다고 했고, 2020년에는 해법을 경매에 부치겠다고 했다.

주요 가설과 각각의 약점

(1) 힐 암호 가설. 암호표의 여분 문자 L과 암호문의 통계적 성질이 근거다. 약점은 L 하나라는 증거가 매우 얇고, 샌본이 판매용 소형 모형에서는 그 L을 빼버렸다는 점이다. 즉 제작자 자신이 그 문자를 암호 설계의 필수 요소로 다루지 않았다.

(2) 일회용 난수표에 가까운 체계 가설. K4에만 다른 방법이 쓰였다는 셰이트의 '방법론의 변화' 발언이 근거다. 약점은 일회용 난수표라면 힌트도 무의미해지는데, 샌본은 계속 뜻이 통하는 평문 단어들을 공개해 왔다.

(3) 기존 세 구간과 같은 체계의 변형 가설. 같은 조형물 안에서 체계가 급격히 바뀔 이유가 없다는 상식이 근거다. 약점은 세 구간만으로는 키워드를 역산할 단서가 부족하고, 지금까지 나온 후보 해법이 이 가설 아래에서 서로 충돌한다.

(4) 정답이 이미 밖에 있다는 가설. 2025년 9월 기자 재렛 코벡과 리처드 번이 스미스소니언 미국미술아카이브에 기증된 샌본의 서류에서 조각들을 맞추면 K4 평문이 되는 종이 조각들을 발견했고, 샌본이 그 정확성을 확인했다. 샌본은 해당 파일을 2075년까지 봉인해 달라고 요청했고 기관이 이를 수용했다. 약점은 이 이야기의 핵심 사료가 봉인되어 있어 독립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반전: 풀리지 않은 것은 암호뿐이 아니다

흔한 통념은 '인류가 아직 못 푸는 마지막 암호'다. 그러나 2025년의 일들을 보면 사정이 다르다. 샌본은 2025년 8월 워싱턴포스트에 보낸 편지에서 K4 해법을 경매에 부치겠다고 밝혔고, 자신이 "더 이상 그것을 유지하고 다른 작업을 계속할 신체적·정신적·재정적 자원이 없다"고 적었다. RR옥션의 'Decoding History: Kryptos, Enigma and the Rosetta Stone' 경매는 2025년 10월 16일부터 11월 20일까지 진행되었고, 샌본의 K4 해법, 원형, 암호표 등 자료가 출품되어 최종 낙찰가는 96만 2,500달러였다. 2026년 6월에는 벤처캐피털 패러다임이 익명 낙찰자였다고 밝히고 웹사이트와 10개 문제로 이루어진 공개 챌린지를 열었다. 즉 지금 K4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아니라 '소수가 보관하고 있는 비밀'이다.

또 하나의 반전은 조형물의 오류가 의도인지 실수인지조차 확정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2006년 샌본은 두 번째 구간에서 S 하나를 빠뜨렸다고 인정하며 'WESTIDBYROWS'가 아니라 'WESTXLAYERTWO'가 맞다고 정정했다. 같은 해 그는 "1,800자의 글자에서 실수를 하나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것은 수리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2005년에는 "내 작품 대부분은 의도적으로 실수투성이다"라고 했다. 오타가 미스터리의 일부인지 제작 오류인지조차 이 조형물에서는 경계가 흐릿하다.

사료의 한계

첫째, 주된 1차 자료인 코딩 차트와 원형, 해법 문서가 2025년 이후 사적 소유와 봉인 상태에 들어갔다. 둘째, 샌본 본인의 발언이 시기별로 모순된다(웹스터에게 해법을 줬다는 발언, K5의 존재 확인, 경매 이유). 셋째, K4 해법을 둘러싼 여러 주장은 경매 과정에서 법적 압박을 받은 정황까지 언급되고 있어, 공개 여부 자체가 이해관계와 얽혀 있다. 코벡과 번이 옥션 측 변호인으로부터 저작권 침해와 계약 방해로 압박받았다는 주장은 그들의 진술이며, 별도로 법원 판단이 확인된 것은 아니다.

넷째, 대중문화의 각색도 사료를 흐린다.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 책날개에는 두 번째 구간의 좌표가 거의 그대로 인쇄되어 있고, 『로스트 심볼』에도 크립토스가 등장한다. 이런 인용이 '미스터리를 둘러싼 이야기'를 '미스터리 자체'보다 더 유명하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

크립토스는 비밀을 지키는 기관의 정문 앞마당에, 비밀을 공개적으로 새겨 둔 조형물이다. 국가 정보기관이 미술품에 자기 직원의 이름('WW')을 넣게 하고, 예술가가 그 해석을 30여 년 동안 조금씩 흘리게 한 구조 자체가 이른바 공개 외교다. 정보기관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우리는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사실이지, 그 내용이 아니다.

36년 동안 K4가 풀리지 않았다는 것은 해독자들이 부족했다는 뜻이기도 하고, 동시에 이 퍼즐이 수학 문제가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순간에 공개되는 유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정답이 이미 봉투 안에 있고, 그 봉투가 경매로 넘어갔다는 사실은 이 사건의 성격을 잘 보여 준다.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

비밀을 사는 것도 권리인가? 한 조각가가 자기 작품의 답을 팔 권리가 있다면, 그 조형물을 보러 CIA 앞마당까지 간 사람들의 기대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평문의 일부가 이미 밝혀진 상태에서, '풀리지 않았다'는 표현은 아직 정확한가? 여러분은 K4를 미해결의 암호로 보는가, 아니면 보류된 정보로 보는가.

참고 자료

· 위키백과 영문판 「Kryptos」 https://en.wikipedia.org/wiki/Kryptos
· 위키백과 한국어판 「크립토스」 https://ko.wikipedia.org/wiki/크립토스
· Bauer, Link, Molle, "James Sanborn's Kryptos and the matrix encryption conjecture", Cryptologia 40(5), 2016, doi:10.1080/01611194.2016.1141556
· Bean, "Cryptodiagnosis of Kryptos K4", HistoCrypt 2021, doi:10.3384/ecp183153
· 샌본의 힌트 공개 보도(2010·2014·2020)와 2025년 RR옥션 경매 결과는 위키백과 해당 문서의 인용을 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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