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분기, 암스테르담 PC 호프트스트라트(P.C. Hooftstraat)의 1㎡당 연 임대료는 3,500유로다. 2019년보다 23% 올랐다. 벨기에·프랑스 국경을 넘어온 명품 브랜드들이 줄을 서는 이 거리에서, 상점 한 칸을 얻기 위해 임차인이 새로 낼 수 있는 권리금은 다시 생겨났고, 심지어 부르는 값보다 더 얹어 내는 사례까지 나온다. 같은 도시의 칼베르스트라트(Kalverstraat)는 정반대다. 2019년 대비 임대료가 20~35% 빠졌다. 한 도시 안에서 한쪽은 줄을 서고 한쪽은 값을 깎아도 빈 채로 남는다 — CBRE 네덜란드가 2025년 발표한 '네덜란드 주요 상업가의 회복력(The Resilience of Dutch Prime Shopping Streets)' 보고서가 그린 풍경이다.
공실 4.3%, '건강한 수준'이라는 숫자의 함정
보고서는 네덜란드 15개 도시의 대표 상업가 25곳을 조사했다. 평균 공실률은 4.3%로, 2019년보다 1%포인트 오른 수치다. 부동산업계가 말하는 '마찰적 공실(frictional vacancy)', 곧 점포가 바뀔 때 잠깐 비는 정도의 자연스러운 빈자리 범위 안에 들어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같은 기간 유동인구는 평균 8% 줄었다. 사람은 덜 지나다니는데 가게는 덜 비었다. 이 두 숫자가 같이 움직이는 곳이 바로 회복한 거리다.
가장 눈에 띄는 건 1㎡당 임대료의 궤적이다. 25개 거리의 프라임 임대료(가장 수요가 몰리는 'A입지' 점포의 임대료)는 2019년 이후 평균 9% 내렸다. 로테르담 린바안(Lijnbaan), 헤이그 흐로테마르크트스트라트(Grote Marktstraat), 위트레흐트 아우데흐라흐트(Oudegracht)처럼 대도시의 간판 상업가가 20~35% 빠졌고, 브레다·틸뤼르흐·아른험·즈볼러 같은 중형 도시도 20~30% 하락했다. 10년 가까이 값을 낮춰온 뒤에야 지금의 균형이 왔다.
권리금이란 무엇인가 — 네덜란드식 'key money'
한국 독자에게 가장 낯선 대목은 'key money'다. 보고서는 이를 '점포 임차권을 얻기 위해 임대인이나 기존 임차인에게 한 번에 지급하는, 흔히 비공식적인 돈'으로 정의한다. 월세와는 별도로 얹는 목돈이라는 점에서 한국의 권리금과 구조가 닮았다. 눈에 띄는 차이는 두 가지다. 첫째, 네덜란드에서는 이 돈이 상권이 뜨거울 때만 등장하고, 비면 사라진다. 보고서는 ‘희소성과 꾸준한 수요 때문에 key money가 돌아왔고, 일부는 요구 가격을 넘겨서 낸다’고 적는다. 한국에서 권리금이 사실상 모든 점포에 붙는 관행인 것과 비교하면, 이쪽은 상권 온도를 재는 바로미터에 가깝다.
둘째, 임차인의 법적 지위가 다르다. 네덜란드는 임차인 보호가 강한 편이라 상가 임대차 계약이 사실상 장기전세처럼 굴러가고, 그래서 '들어갈 권리' 자체가 거래되는 시장이 생긴다. 다만 이 보고서는 임대차 계약 기간·갱신권·보증금 구조를 직접 다루지 않는다. 임대차 법률에 관한 구체적 설명은 이 원문에서 확인되지 않음을 밝혀둔다. 보고서가 다루는 것은 임대료·공실률·업종 구성이라는 시장 지표뿐이다.
패션 68%에서 61%로 — 거리가 '쇼핑'에서 '체류'로
업종 구성의 변화는 숫자로 또렷하다. 2019년과 2025년 사이 25개 거리의 패션·명품 비중은 68%에서 61%로 줄었다. 같은 기간 식음료(F&B)는 7%에서 9%로, 레저는 10%에서 13%로 늘었다. 명품 가게가 빠진 자리에 카페와 전시, 체험형 매장이 들어왔다는 뜻이다. 보고서는 이걸 '소비 동기가 하나에서 여럿으로' 바뀐 결과로 읽는다. 의류만 사러 오던 거리가 커피를 마시고, 구경하고, 시간을 보내는 거리가 되면서 매출 기반이 넓어졌다는 논리다.
브랜드의 움직임도 같은 방향이다. 보고서는 마이주얼리(MyJewellery), 리추얼스(Rituals), 미니소(Miniso), 뉴발란스(New Balance), 노멀(Normal), 데카트론(Decathlon)이 점포를 늘리고, 오이쇼(Oysho)와 유니클로(UNIQLO) 같은 새 얼굴이 거리의 매력을 더한다고 적었다. 위트레흐트 아우데흐라흐트에는 유니클로가 새 닻으로 들어왔다. 반대로 헤이그 슈이스트라트(Spuistraat)와 흐로테마르크트스트라트는 인근 대형 쇼핑센터 '몰 오브 더 네덜란즈(Mall of the Netherlands)'와 정면으로 부딪히며 성장이 제한적이라고 분석했다. 같은 도시, 다른 운명이다.
왜 이렇게 됐나 — 이커머스 23.4%가 만든 역설
원인은 한 방향이 아니다. 첫째, 전자상거래다. CBRE의 별도 분석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온라인 매출 비중은 2005년 2.0%에서 2025년 23.4%까지 올랐고, 2030년에는 27.8%가 예상된다. 이커머스가 강할수록 약한 거리는 먼저 무너졌다. 실제로 보고서는 '2차 거리(secondary streets)'가 비고 점포가 다른 용도로 바뀌면서 도심 상권이 '더 콤팩트하게' 재편됐다고 적는다. 둘째, 코로나19다. 봉쇄, 일시적 매출 급감, 물가 상승으로 인한 비용 폭증이 겹쳤다. 셋째, 인구다. 2005년 이후 인구는 거의 200만 명 늘었는데 상업 면적은 거의 늘지 않아 1인당 상업면적은 줄었다. 사람은 늘고 가게는 그대로인 셈이니, 남는 자리는 강한 입지만 차지하게 된다.
넷째, 관광과 명품 수요다. 보고서는 PC 호프트스트라트가 '국제 브랜드, 관광객, 그리고 코로나 이후의 명품 붐'에서 직접 혜택을 본다고 명시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거리의 임대료가 지역 소비가 아니라 국제 수요로 결정된다는 점이다. 보고서는 이곳의 점포를 '판매점이 아니라 브랜드 전략에 대한 투자'로 규정한다. 그래서 주변 상권이 흔들려도 이 거리의 값은 따로 논다.
반전 — '상권 몰락'이 아니라 '용도 전환'이다
통념은 이렇다. 이커머스가 뜨면 오프라인 상권은 죽는다. 실제 데이터는 다른 그림을 보여준다. 네덜란드의 상업용 부동산 공실률은 2013년 7.6%, 2019년 7.8%까지 올랐다가 2025년 5.4%로 내려왔다. 1㎡당 매출은 2013년 3,243유로에서 2025년 3,834유로로 올랐다. 가게 수가 줄고 남은 가게의 효율이 올라간 것이다. 보고서의 표현을 빌리면 상권 재편은 '대부분 완료'됐다.
더 흥미로운 반전은 '죽은 거리'로 분류됐던 곳들의 재해석이다. 보고서는 아른험 케텔스트라트(Ketelstraat), 틸뤼르흐 회펠스트라트(Heuvelstraat), 하를럼 흐로테하우트스트라트(Grote Houtstraat), 브레다 히네켄스트라트(Ginnekenstraat)를 '방문객 감소·공실 상승·높은 점포 교체율'이 겹친 압박 지역으로 꼽으면서도, 그 처방으로 용도 혼합(문화·식음료·레저), 차별화된 컨셉 도입, 상업 공간의 주거 전환, 거리 녹화를 제시한다. 임대료를 더 깎아 임차인을 구하는 대신, 아예 상가를 주거로 바꿔 수요 자체를 리모델링한다는 발상이다. 한국의 '상권 부활' 담론이 대개 임대료 인하와 임차인 지원에 머무는 것과 대조적이다.
한국과 비교 — 신촌의 공실과 암스테르담의 성수
한국에서 이 보고서와 겹쳐 볼 만한 곳은 서울 신촌이다. 최근 신촌은 임대료를 낮춰도 임차인이 들어오지 않는 '무권리금 공실' 현상으로 상권 논쟁의 중심에 섰다. 반대로 성수동은 공실률이 2%대까지 떨어지며 임대료와 권리금이 함께 뛰었다. 네덜란드의 구도와 놀랍도록 닮았다. 한 도시 안에서 강한 입지와 약한 입지의 격차가 벌어지고, 그 격차가 권리금의 유무로 즉시 표시된다는 점이 같다.
다른 점은 세 가지다. 첫째, 네덜란드에서는 대도시 간판 거리조차 20~35% 임대료를 내렸다는 사실이 공개 데이터로 확인된다. 한국에서는 상가 임대료의 실제 거래 가격이 잘 드러나지 않아 '얼마나 내렸는가'를 논하기 어렵다. 둘째, 용도 전환의 속도다. 네덜란드는 상가를 주거로 바꾸는 것을 정책적 처방으로 공식 논의하지만, 한국은 용도 변경 규제와 소유주 이해관계가 얽혀 훨씬 느리다. 셋째, 소유 구조다. 네덜란드 상가는 투자기관과 부동산 펀드가 상당 부분 보유해 '거리 단위 최적화'가 가능하지만, 한국 상가는 개인 소유주가 잘게 나뉘어 있어 거리 전체를 하나의 포트폴리오로 관리하기 어렵다. 한국 쪽 수치와 제도 비교는 이 원문의 근거가 아니며, 일반적 배경 설명임을 밝힌다.
사료의 한계 — 누구의 눈으로 본 보고서인가
이 보고서는 CBRE 리서치, 곧 세계 최대 상업용 부동산 서비스 기업이 발행했다. 임대료와 공실률, 투자 수익률을 측정해 '어디에 투자할 만한가'를 답하는 것이 목적이다. 따라서 이 텍스트는 임차인이나 소상공인의 시각이 아니라 임대인·투자자의 시각에서 쓰였다. '회복(resilience)'이라는 단어가 긍정적으로 읽히는 이유도 여기 있다. 임대료가 오르는 것은 투자자에게 좋은 소식이지만, 그 거리에 처음 문을 열려는 자영업자에게는 진입 장벽의 상승이다.
또한 이 조사는 25개 '프라임' 거리만 다룬다. 뒤로 물러난 2차 거리와 골목 상권은 표본에 들어 있지 않다. '상권이 회복됐다'는 결론은 상위 25개 거리의 이야기이고, 그 아래층은 여전히 비어 있을 수 있다. 보고서 스스로도 전체 계획형 쇼핑센터 중 약 100곳, 150만 ㎡ 이상이 7% 이상의 공실을 안고 있다고 적는다. 화려한 표지 뒤의 그늘이다.
독자에게 — 우리 동네 상권의 '프라임'은 어디인가
PC 호프트스트라트의 3,500유로는 극단값이다. 하지만 이 보고서가 던지는 질문은 그 숫자가 아니다. 같은 도시에서 어떤 거리는 값을 올리고 어떤 거리는 용도를 바꾸는가, 그리고 그 갈림길에서 우리는 임대료를 깎을 것인가, 아니면 거리의 기능 자체를 바꿀 것인가. 여러분이 사는 동네에서 지금 권리금이 붙는 거리와, 임대료를 내려도 비어 있는 거리는 각각 어디인가. 그 차이는 무엇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참고 자료
· CBRE, 「The Resilience of Dutch Prime Shopping Streets」, 2025년 12월 11일 — https://www.cbre.co.uk/insights/reports/the-resilience-of-dutch-prime-shopping-streets
· CBRE, 「Larger shopping centres are regaining investor interest」, 2025년 8월 21일 (네덜란드 상업면적·이커머스 비중·공실률 시계열) — https://www.cbre.nl/en-gb/insights/viewpoints/larger-shopping-centres-are-regaining-investor-interest
· 이미지: 'PC Hooftstraat, Amsterdam' by Steven Lek, CC0 (Public Domain Dedication), Wikimedia Commons
댓글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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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0.31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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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0.31 16:51
ㄹㅇㅋㅋ 우리나라면 법 개정될 때까지 한 세월 걸릴 듯
그냥 집으로 바꿔서 사람 들어오게 하는 게 훨씬 현실적이긴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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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0.31 16:55
ㄹㅇㅋㅋ 여기선 건물주가 맘먹어도 구청에서 컷할 확률 99%임
그냥 놔두면 계속 공실일 텐데 진짜 아쉬운 부분인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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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0.31 21:43
ㄹㅇㅋㅋ 규제 풀리려면 한참 걸릴 텐데 그냥 빈 집으로 놔두느니 차라리 바꾸는 게 효율적일 것 같긴 함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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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0.31 21:56
ㄹㅇ 우리나라 규제 생각하면 진짜 먼 나라 이야기 같네요ㅋㅋ 그냥 놔두면 유령 거리 될 텐데 효율성 진짜 떨어지는 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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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0.31 15:44
결국 명품이나 초핵심 입지만 살아남는 구조네요. 진짜 양극화 ㄷㄷ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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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0.31 21:14
진짜 뼈 때리네요.
어설픈 입지는 다 죽고
완전 톱티어만 살아남는 느낌임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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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0.31 22:43
ㄹㅇㅋㅋ 어중간한 곳들은 다 밀려나고
결국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인듯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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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0.31 18:59
명품 브랜드들이 입점하는 걸 그냥 투자의 일환으로 본다는 관점이 신기함. 장사해서 돈 버는 게 아니라 브랜드 홍보용 간판 세우는 느낌이라 일반 상권이랑은 아예 게임이 다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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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0.31 22:15
사람들 유동인구는 줄었는데 공실은 오히려 줄었다는 게 소름돋네요.
결국 힙한 카페나 체험 매장 같은 거로 갈아탄 곳들만 살아남는 구조인듯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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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0.31 23:33
권리금 대목에서 한 가지 보충하겠습니다. 네덜란드어로는 sleutelgeld(열쇠값)라 부르며, 주거 임대차에서는 대가 없는 지급으로 보아 불법이고 법적으로 반환을 청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7:290조 중간상업용 부동산(중소상인 점포)은 임대차 보호 규정이 달라, 이 글이 다룬 상가 권리금이 같은 금지 규정에 걸리는지는 별개 문제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Wikipedia: Key money -
빗방울
2026.10.31 23:41
키머니가 한국의 권리금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법적 근거입니다. 한국은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이 권리금 회수 기회를 임대인에게 의무화해 제도권 안에 있지만, 네덜란드는 민법상 계약자유에 맡겨진 비공식 관행이라 상권 열기에 따라 생겼다 사라집니다. 이 차이가 "바로미터"라는 표현을 가능하게 한 배경 아닐까 싶습니다. 근거: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 -
빗방울
2026.11.01 01:07
임대료를 깎아서가 아니라 아예 상가를 주거로 바꾼다는 처방에서 한참 멈춰 섰습니다. 값을 낮춰도 손님이 안 오는 거리는 결국 수요를 다시 불러와야 한다는 얘기로 읽혔거든요. 저도 신촌에서 몇 달 비어 있는 1층 가게들을 지나며 '여기는 뭐가 와야 하지' 하고 혼자 답을 못 내렸는데, 질문 자체가 틀렸던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가게가 사라진 거리에 사람이 살기 시작하면, 그 거리는 누구의 거리가 되는 걸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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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안부부터 깊은 생각까지, 함께 나눠요.
상가를 주거로 바꾸는 게 진짜 신박하네요
한국은 용도변경 빡세서 상상도 못 할 일인듯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