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5년 5월 19일 아침, 잉글랜드 켄트주의 그린하이스 항구에서 증기기관으로 개조된 기관차 엔진을 실은 두 척의 배가 출항했다. 배 이름은 에러버스(HMS Erebus)와 테러(HMS Terror). 탑승자는 장교 24명과 선원 110명, 출항 직후 그린란드에서 병자 5명을 돌려보내 최종 129명이었다. 이들은 당대 최고의 공학으로 무장한 배 두 척, 3년치 식량, 1,000권이 넘는 장서를 갖고 캐나다 북극의 마지막 미탐사 구간을 통과해 북서항로를 뚫겠다고 나섰다. 유럽인이 그 두 배를 목격한 것은 그해 7월 베핀만이 마지막이었다. 이후 170여 년 동안 이 원정에 대해 남은 1차 문헌은 종이 한 장이었다.
마지막 쪽지가 놓인 자리
1859년 5월, 프랜시스 맥클린톡이 이끈 탐색대의 부관 윌리엄 홉슨이 킹윌리엄섬 북서 해안의 돌무지(cairn)에서 해군성 인쇄 양식에 적힌 쪽지를 찾아냈다. 첫 부분은 1847년 5월 28일자로, "에러버스와 테러 함은 1846~47년 겨울을 이곳 위도 70°5′N, 경도 98°23′W에서 보냈고, 모두 무사하다(All well)"고 적혀 있었다. 같은 종이의 여백에는 1848년 4월 25일자로 두 번째 글이 덧붙여 있었다.
"테러와 에러버스 함은 1848년 4월 22일 버려졌다. 1846년 9월 12일부터 얼음에 갇혀 있었다. 프랜시스 크로지어 선장 지휘 아래 장교와 선원 105명이 이곳에 상륙했다. … 존 프랭클린 경은 1847년 6월 11일 사망했고, 이날까지 원정대의 사망자는 장교 9명, 병사 15명이다." 그리고 "내일 26일 백 강(Back's Fish River)으로 출발한다." 두 번째 글에는 크로지어와 에러버스 함장 제임스 피츠제임스가 서명했다. 이 원정의 진행 상황을 알려주는 동시대 문서는 이것뿐이다.
확인된 것: 시신, 뼈, 그리고 배
확인된 사실은 놀랄 만큼 구체적이다. 1845~46년 겨울을 보낸 비치섬에서 존 토링턴, 존 하트넬, 윌리엄 브레인의 묘 3기가 1850년 발견되었고, 1984년과 1986년 부검을 위해 발굴됐다. 영구동토에 보존된 시신은 사망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고, 토링턴의 부검 결과 직접 사인은 폐렴으로 판정됐다. 해군성 기록과 유품, 이누이트의 증언이 교차 확인되는 범위는 여기까지다.
일라이자 켄트 케인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J. 해밀턴이 그린 〈비치섬에 있는 프랭클린 선원들의 무덤〉(1854년경, 1845~46년 겨울 막사 유적) — Elisha Kent Kane,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배는 훨씬 나중에 나왔다. 2014년 9월 7일, 캐나다 공원청(Parks Canada)이 이끈 탐색팀이 퀸모드 만 동쪽 윌모트앤크램프턴 만 수심 약 11m에서 에러버스를 찾았고, 2014년 10월 1일 스티븐 하퍼 총리가 이를 공식 확인했다. 2016년 9월 12일에는 북극연구재단(Arctic Research Foundation)이 킹윌리엄섬 남쪽 테러 만의 수심 24m에서 테러를 발견했다고 발표했으며, 선체는 "원형 그대로(pristine)"라는 평가를 받았다. 두 난파선은 2019년 합동 국립사적으로 지정됐다.
왜 설명이 어려운가
난점은 먼저 물리적이다. 배가 버려진 지점(1848년 4월 22일)에서 백 강까지는 약 400km다. 남은 105명은 정박한 지형에서 내륙 횡단을 하도록 훈련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맥클린톡은 1859년 해안에서 발견된 구명정 안에 부츠, 비단 손수건, 향수 비누, 스펀지, 슬리퍼, 책까지 실려 있던 것을 기록하며 "쓸데없는 무게의 축적(a mere accumulation of dead weight)"이라고 평했다. 항해사들이 육로를 걷는다는 발상 자체가 계획 단계에서 실패한 것인지, 아니면 판단력이 이미 손상된 상태였는지가 첫 번째 난점이다.
프랑수아 뮈쟁, 〈얼음에 갇힌 HMS 에러버스〉(1846년 정박을 그린 19세기 유화) — François Musin,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 Royal Museums Greenwich, BHC3325)
역사적 난점은 정보의 비대칭이다. 원정대의 일지와 항해 기록은 단 한 장도 남지 않았다. 1878~80년 슈와트카 원정은 11개월 4일, 4,360km를 썰매로 이동하며 기록이 "합리적 의심을 넘어" 소실됐다고 결론지었다. 즉 우리가 아는 것은 두 종류의 출처뿐이다. 1848년 이후의 유럽인 기록(사실상 없음)과, 이누이트 구전 증언(풍부하지만 사건 후 수년에서 수십 년 사이에 채록됨)이다. 서로 다른 언어와 세계관으로 전해진 두 기록이 어디까지 같은 사건을 가리키는지 판정하는 일이 두 번째 난점이다.
가설 1: 납 중독이 판단을 흐렸다 — 그럴듯하지만 약점이 뚜렷하다
1981년 앨버타대학의 오언 비티 팀이 킹윌리엄섬에서 채취한 뼈에서 226ppm의 납을 검출했다. 같은 지역 이누이트 뼈 대조군 26~36ppm의 약 10배였다. 이 선박은 증기 추진을 위해 시간당 약 1t의 담수를 필요로 했고, 당시 재료로 만든 증류기가 높은 납 함량의 물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제기된다(윌리엄 배터스비). 통조림 납땜도 납 공급원 후보였다.
그러나 2013년 연구는 하트넬과 다른 선원의 뼈·손톱을 재분석해, 납 농도와 동위원소 조성이 생애 동안 거의 일정했다면 마지막 수개월의 급격한 노출은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2016년 미소 X선 형광 분석은 하트넬의 손톱에서 마지막 몇 주를 제외하면 납이 정상 범위였고, 대신 아연 결핍이 심각했다는 결과를 내놓았다. 납 중독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지만, "판단력 상실의 주범"이라는 주장은 근거가 약해졌다.
가설 2: 아연·비타민 결핍, 그리고 지나친 육상 활동
두 번의 겨울을 얼음 속에서 보내며 육지에서 약 20km 떨어진 배에 의존했다는 점이 다른 북극 원정과 결정적으로 다른 조건이다. 사냥과 어획 기회가 거의 없었고 저장식에 의존했으며, 그 식단엔 비타민 C뿐 아니라 당시 알려지지 않았던 티아민 같은 영양소도 부족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016년 연구의 아연 결핍 결론은 면역력 저하와 기존 결핵 악화를 설명한다.
약점은 이 가설이 "왜 죽었는가"는 설명하지만 "왜 그렇게 멀리까지, 왜 그렇게 많은 물건을 가지고 갔는가"는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영양 결핍은 사후 관찰로 확인되지만, 결정의 순서(상륙 시점, 남하 경로, 포기 시점)는 여전히 추정에 기댄다.
가설 3: 식인 — 기록과 뼈가 말하는 것
1854년 4월 21일 펠리 만 근처에서 존 레이는 이누이트를 만나 백 강 하구에서 굶어 죽은 백인 35~40명의 이야기와, 그들 사이 식인에 관한 보고를 들었다. 같은 해 10월 해군성은 허드슨베이 회사에 백 강 탐사대 파견을 요청하며 이 보고를 전달했다. 1992년 에러버스 만의 유적 NgLj-2에서 발굴된 약 400점의 뼈에는 살을 발라낸 흔적(de-fleshing)과 함께 끓는 냄비에서 뼈 끝이 마찰한 ‘냄비 연마(pot polishing)’ 흔적이 있었고, 이는 식인의 마지막 단계에서 골수를 빼내려 한 행위로 해석된다.
약점은 시간과 주체의 불확실성이다. 이 흔적은 "누군가가 시신을 처리했다"는 사실을 보여주지만, 언제 누가 했는지, 죽음 직전의 절박함이었는지는 뼈만으로 판정할 수 없다. 기록 쪽 약점도 있다. 레이의 보고는 간접 증언이며, 그가 전한 숫자와 장소는 채록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반전: 2024년에 밝혀진 이름
2024년 9월, 워털루대학의 더글러스 스텐턴과 레이크헤드대학의 로버트 파크 팀은 에러버스 만 일대에서 발굴된 아래턱뼈가 DNA 검사로 제임스 피츠제임스 함장의 것임을 확인했다고 발표했다. 피츠제임스는 원정대 2인자였고, 지금까지 확인된 원정대원 가운데 최고위 인물이다. 결정적 대조군은 그의 증조부 제임스 갬비어의 후손인 나이절 갬비어였고, 역사가 파비앤 테터루가 계보를 검토해 연결시켰다. 2021년에는 선원 존 그레고리가 먼저 확인됐으니 피츠제임스는 두 번째 확인 사례다.
반전은 그 아래턱뼈에 식인을 시사하는 절단 흔적이 있었다는 점이다. 원정대 2인자가 시신으로 먹혔다는 사실은, 식인이 "마지막에 남은 이름 없는 선원들의 일"이라는 19세기 상상을 뒤집는다. 더 중요한 것은 확인의 방향이다. 지난 170년 동안 원정대의 실패는 "납 중독에 판단력을 잃은 함장과 선원들"이라는 의료 이야기로 정리되는 경향이 있었다. 새 DNA 확인은 그 이야기의 중심을 개인의 상태에서 집단의 순서, 즉 누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가라는 고고학적 질문으로 옮겨 놓았다.
사료의 한계
1차 자료는 빈약하고 이차 자료는 넘친다. 유일한 동시대 문서인 빅토리포인트 쪽지조차, 같은 사실 오기(비치섬에서 겨울을 보낸 날짜)가 든 사본 두 장이 남았다는 점에서 필자들이 배 위에서 미리 써두고 내려 서명만 했다는 추정이 가능하다. 즉 쪽지의 "All well"은 그 시점의 사실 보고라기보다 해군성 관례에 맞춘 보고 형식에 가깝다.
후대의 이야기도 자료다. 레이가 보고한 식인을 두고 찰스 디킨스는 "그런 끔찍한 방법으로 목숨을 연장한 멤버가 있을 이유는 전혀 없다"고 반박했고, 레이디 프랭클린도 남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식인설을 부인하는 데 힘을 쏟았다. 이 이야기는 사료로 검증되기 전에 먼저 사회적 감정의 대상이 됐다. 2018년 AMC 드라마 〈더 테러〉처럼 초자연적 괴물을 등장시키는 각색이 성공을 거둔 것도, 실패의 원인을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로 돌리고 싶은 욕망이 여전히 살아 있음을 보여준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
이 사건이 계속 회자되는 이유는 미제 사건으로서의 매력만이 아니다. 첫째, 1845년의 원정은 당시 최첨단 기술(증기, 철제 선수, 담수 증류, 통조림)을 총동원했으면서 가장 기본적인 생존 훈련은 간과한 경우였다. 기술적 자신감이 현장 조건을 이겼다고 믿었을 때 벌어지는 일을 보여준다. 둘째, 탐색 원정들이 수천 마일에 이르는 미측량 해안선을 그려내며 북극 지리학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역설이다. 리처드 시리액스는 "원정대의 소실이 성공적인 귀환보다 더 많은 지리적 지식을 더했을 것"이라고 썼다.
셋째, 이 이야기의 중심에는 이누이트가 있다. 레이에게 증언한 사람들, 1860년대 찰스 프랜시스 홀에게 수백 페이지의 증언을 남긴 이누이트 안내인들, 2008년 이후 탐색에 참여한 지역 역사가 루이 캐무카크가 모두 여기에 있다. 배를 찾은 것은 유럽인들의 탐사가 아니라, 그들의 구전이 가리킨 좌표였다. 원정대의 실패담이 "미지의 땅에 버려진 백인들"의 이야기로만 소비될 때, 정작 그들의 마지막을 목격하고 기록한 사람들의 지식은 배경으로 밀려난다.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
피츠제임스의 아래턱뼈처럼, 이제 원정대원 대부분의 신원은 DNA로 하나씩 맞춰지고 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미스터리"로 남는 이유는 무엇일까. 남은 질문은 신원이 아니라 순서의 문제, 즉 105명이 배를 떠난 1848년 4월 26일부터 마지막 한 명이 숨을 거둔 시점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다. 여러분이라면 그 순서를 복원하는 데 가장 믿을 만한 증거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남은 뼈와 유품인가, 150년 전 이누이트의 말인가.
참고 자료
・ 위키백과(영어) Franklin's lost expedition — 빅토리포인트 쪽지 원문, 2014·2016년 난파선 발견, 2024년 확인 사례, 식인 뼈 분석
・ 위키백과(영어) James Fitzjames — 2024년 9월 DNA 확인과 계보 대조 과정
・ 1차 사료: 빅토리포인트 쪽지(1847·1848, 해군성 인쇄 양식, 1859년 윌리엄 홉슨 발견)
・ 오언 비티 등, 1981·1984·1986년 킹윌리엄섬·비치섬 조사 보고(납 농도 226ppm) / 2013·2016년 납·아연 재분석 연구
・ 존 레이의 1854년 보고, 맥클린톡 원정(1857~59), 슈와트카 원정(1878~80) 기록
・ 캐나다 공원청(Parks Canada) 2014년 에러버스 발견 발표, 북극연구재단 2016년 테러 발견 발표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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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1.01 14:00
향수 비누랑 슬리퍼까지 챙겨서 400km를 걸으려 했다는 대목에서 한참 멈췄습니다. 그건 판단이 흐려진 걸까요, 아니면 그때까지도 배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던 걸까요? 배를 찾아낸 게 유럽인 탐사가 아니라 이누이트 구전이 가리킨 좌표였다는 이야기는, 170년 동안 누가 이 사건의 주인이었는지를 다시 생각하게 하네요. -
빗방울
2026.11.01 16:37
쪽지 뒤에 또 하나 웃긴 게 디킨스가 식인설 반박한 거 ㅋㅋ 증거도 없이 명예 지키려고 우긴 건데 나중에 뼈에서 냄비 연마 흔적까지 나옴 ㄷㄷ 170년 뒤에 소설가한테 세금 물린 기분이었을 듯 -
빗방울
2026.11.01 17:05
구명정에 부츠랑 비단 손수건을 챙겨 넣은 그 심리는 대체 뭘까요? 400km 걷겠다고 마음먹은 사람들이 왜 스펀지를 챙겼는지. 그리고 2024년에 피츠제임스 함장 이름이 붙었다니, 이제 뼈 조각마다 이름표를 달아주는 순서로 가는 걸까요? 이름이 다 붙으면 미스터리는 끝나는 건가요, 아니면 시작인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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