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말, 영국 총리는 자기 정당의 전당대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국의 하이스트리트(high street, 한국의 도심 중심 상가거리)는 '쇠퇴의 물결에 맞서 고군분투하고 있다'고. 그 연설 직후, 도시경제 싱크탱크 센터 포 시티즈(Centre for Cities)가 이어진 글을 냈다. 제목은 정반대였다. 하이스트리트는 운명이 정해진 게 아니며, 런던을 보라고. 근거는 단순한 비교 하나다. 런던 중심부의 하이스트리트 평균 과세가치(rateable value)는 ㎡당 496파운드에, 공실률은 겨우 7퍼센트다. 웨일스의 항구도시 뉴포트는 ㎡당 91파운드에 공실률 19퍼센트다. 임대료가 다섯 배 높은 동네가 빈 점포는 절반 이하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글은 그 반직관적인 숫자가 왜 나오는지, 그리고 그 이면에 있는 영국의 상가 임대·소유 제도를 한국 독자의 언어로 풀어본다.
과세가치는 임대료가 아니라 '임대료의 지표'다
먼저 용어를 정리하자. 영국 지방정부는 상업용 건물마다 과세가치(rateable value)를 산정한다. 이는 그 건물을 시장에서 임대했을 때 받을 수 있을 법한 연간 임대료로 매겨지는 개념이다. 한국으로 치면 건축물 시가표준액이나 공시지가에, 상업 재산세( business rates )의 과세표준을 겹쳐 놓은 것에 가깝다. 주목할 점은 이 값이 실제로 체결된 계약서상의 임대료가 아니라 '그 자리에 얼마나 많은 사업자가 들어오고 싶어 하는가'를 드러내는 지표로 쓰인다는 것이다. 글이 인용한 논리도 이 지점이다. 임대료란 결국 사업자가 그 자리에서 벌어들일 것으로 기대하는 매출에 대한 지불 의사다. 그러니 과세가치가 높은 거리는 유동 인구가 많거나 소득이 높거나 외부 방문객이 많이 찾아오는 거리이고, 그런 곳은 빈 점포가 적은 것이 당연하다.
전국 비교는 이 설명을 깔끔하게 뒷받침한다. 런던 중심부 496파운드·공실률 7퍼센트, 뉴포트 91파운드·공실률 19퍼센트. 수요가 임대료를 밀어 올리고, 수요가 점포를 채운다. 문제는 이 공식이 도시와 도시 사이에서는 잘 맞는데, 런던 내부로 들어가면 흐릿해진다는 것이다.
런던 안에서는 상관관계가 흐려진다
글은 런던 외곽 하이스트리트만 따로 놓고 과세가치와 공실률을 다시 찍어본다. 과세가치가 높은 거리는 대체로 공실률이 낮지만, 과세가치가 낮은 거리가 반드시 공실률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관계가 끊긴다. 저자는 이를 '퍼즐'이라고 부른 뒤, 답을 이렇게 제시한다. 런던은 전반의 수요 자체가 워낙 두터워서, 상대적으로 약한 거리조차 점포를 채우고 공실률을 낮게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수요가 상한에 가까이 붙어 있어서 임대료와 공실률 사이의 여유 공간이 사라진 것이다.
규모의 차이도 제시된다. 런던 외곽 하이스트리트 과세가치의 중앙값은 잉글랜드·웨일스 다른 도시 외곽 어느 곳보다 높고, 런던 밖 평균의 두 배다. 더 눈에 띄는 것은 하위 25퍼센트, 즉 런던에서 가장 약한 하이스트리트들조차 58개 도시 외곽 중 46곳의 중앙값보다 수요가 많다는 비교다. 결과적으로 런던 외곽 하이스트리트의 78퍼센트가 영국 도시 중심부 평균(8~10퍼센트)보다 낮은 공실률을 기록했고, 그 평균은 뉴포트나 브래드퍼드 중심부 공실률의 절반 수준이다.
런던 켄징턴 하이스트리트의 점포들 — Sebastian Ballard, CC BY-SA 2.0 (Wikimedia Commons)
영국의 상가 임대 구조 — 프리홀드와 리스홀드
한국의 상가 시장과 비교하려면 제도부터 봐야 한다. 영국 상업용 부동산은 프리홀드(freehold, 토지와 건물을 함께 영구 소유)와 리스홀드(leasehold, 일정 기간의 사용권만 매입)로 크게 나뉜다. 소매 점포는 건물주(landlord)가 프리홀드를 쥐고, 사업자가 5년·10년·15년 단위의 리스홀드를 임차하는 형태가 일반적이다. 한국의 전세·보증금·권리금 삼층 구조와 대비하면 두 가지가 먼저 다르다. 첫째, 권리금에 정확히 대응하는 법정 제도가 없다. 둘째, 리스홀드 아래에서는 임대차 계약의 갱신·변경에 건물주의 동의가 개입한다. 다만 이 구조가 이 기사에서 직접 다뤄지지는 않는다. 프리홀드·리스홀드의 상세한 조건이나 권리금에 준하는 관행은 이 글에서 설명되지 않았으므로 확인되지 않음으로 남긴다.
대신 기사는 제도 변수 세 가지를 검토 대상으로 놓고는, 결론적으로 셋 다 공실의 주원인은 아니라고 말한다. 재산세(business rates), 온라인 쇼핑의 성장, 그리고 수요. 저자의 판단은 '수요 부족'이다. 재산세와 이커머스는 분명 손익계산서를 압박하지만, 지역 간 공실률 격차를 설명하는 변수로는 수요가 더 강하게 작동한다는 것이다.
점포 대신 술집·식당·헬스장이 남는다
런던의 수요를 버티게 하는 축은 세 가지다. 상권 배후 인구(얼마나 많은 사람이 정기적으로 그 거리에서 소비하는가), 배후 소득(그들이 얼마나 쓸 수 있는가), 그리고 방문 유인(다른 도시와 나라에서 사람을 끌어오는 힘). 저자는 런던 하이스트리트 대부분이 첫 두 조건에서 우수하고, 일부는 세 번째까지 갖췄다고 본다.
그 결과 거리의 업종 구성이 바뀐다. 기사가 지목하는 것은 술집(pubs), 식당, 헬스장이다. 아마존이나 온라인 경쟁으로 대체되지 않은 업종이다. 여기서 이 글의 핵심이 드러난다. 하이스트리트의 쇠퇴를 '점포의 죽음'으로 보면 런던은 예외처럼 보이지만, '용도 전환'으로 보면 런던은 공식을 보여주는 표본이다. 물건을 파는 공간이 사람을 만나고 먹이고 움직이게 하는 공간으로 옮겨간 것이다. 다만 업종별 점포 수나 비중의 구체적 수치는 이 기사에 제시되지 않는다.
통념과 다른 지점 — 문제는 임대료가 아니라 소득이다
정책 논쟁에서 흔히 나오는 처방은 임대료를 낮추거나 재산세를 깎는 것이다. 이 글의 반전은 그 처방의 순서를 바꾼다. 수요를 결정하는 것은 배후 주민의 소득이며, 그래서 정책의 앞자리에 와야 할 것은 일자리와 주거비다. 저자가 내놓는 제안은 세 가지다. 도심 고임금 일자리 확충으로 소득을 올릴 것, 주거비 부담을 낮춰 가처분소득을 늘릴 것, 관광세를 도입한다면 호텔 용지 허가를 통해 방문 경제 자체를 키울 것.
동시에 글은 런던의 성과에 대해 방심하지 않는다. 어디나 런던처럼 될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런던 안에서도 특히 고전하는 하이스트리트와 런던 밖 지역에서는 잉여 소매 공간 자체를 줄이는 개입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수요를 키우는 정책과 공급을 줄이는 정책이 함께 가야 한다는 이중 처방이다.
여기서 한 가지 해석상 경계가 있다. 글은 '런던 대부분이 잘 되고 있다'는 방향으로 서사를 잡지만, 내부 격차가 사라졌다는 증거는 아니다. 과세가치 하위 구간의 공실률이 반드시 높지 않다는 관찰은 좋은 소식이면서 동시에, 하위 구간 거리들이 어떤 방식으로 채워지고 있는지(임시 매장, 저부가 업종)를 묻는 질문이기도 하다. 이 기사는 그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
한국과의 비교 — 명동과 대비되는 것
한국에서 가장 자주 비교되는 사례는 서울 명동이다. 코로나 기간 공실률이 50퍼센트를 넘었던 거리가 관광객 복귀와 함께 회복된 과정은 런던과 닮은 점이 많다. 배후 인구가 아니라 방문 유인, 즉 외부에서 오는 소비가 거리를 되살린 경우다. 차이는 구조에 있다. 명동은 임대인이 개인·중소 법인이고 임차인은 보증금과 권리금을 얹은 개인 사업자인 경우가 많아, 공실이 곧 임대인의 현금흐름 문제로 번진다. 반면 영국은 리스홀드 계약 기간이 길고 건물 소유와 운용이 기관투자자 층에 넓게 분산돼 있어, 빈 점포가 유지되는 시간과 가격 조정의 속도가 다르게 나타난다. 물론 이 속도 차이는 정량적으로 비교된 자료를 확인하지 못했으므로, 방향성 있는 관찰로만 남긴다.
사료의 한계 — 누구의 시선인가
이 글은 센터 포 시티즈라는 도시경제 싱크탱크의 블로그에 실린 자사 보고서 홍보 성격의 텍스트다. 저자가 '수요가 답'이라고 결론 내리는 것은 분석 결과이면서 동시에 그 기관이 일관되게 밀어온 정책 프레임(소득·일자리 중심)과 맞물린다. 재산세나 이커머스를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하는 대목도, 세제 개편 논쟁에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주체(지방정부, 소매업 단체)의 반론을 함께 검토한 글은 아니다. 또 근거의 상당 부분이 과세가치라는 행정 지표에 기대고 있어, 실제 거래 임대료나 업종별 매출 자료와는 다른 층위의 증거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본문에 인용한 수치는 모두 이 원문에 실린 값이다.
독자에게 — 빈 가게는 몇 개여야 적당한가
런던의 7퍼센트와 뉴포트의 19퍼센트 사이에는 단순한 선악 구분이 없다. 다만 질문은 남는다. 우리 동네 상권이 지금 필요한 것은 임대료를 낮추는 일일까, 그 거리를 걸을 사람의 지갑을 두껍게 하는 일일까. 그리고 만약 후자라면, 그것을 상권 정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여러분이 사는 동네는 어느 쪽에 가까운지 궁금하다.
참고 자료
The high street isn't doomed – just look at London, Centre for Cities (블로그), 2025년 12월 4일, https://www.centreforcities.org/blog/the-high-street-isnt-doomed-just-look-at-london/
원 보고서: Follow the money: Explaining the performance of London's suburban high streets, Centre for Cities, 보고서 페이지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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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1.01 15:26
예전엔 동네 상권 얘기 하면 으레 '임대료 좀 낮춰라'부터 나왔지요. 허허, 그런데 런던 숫자를 보니 순서가 거꾸로였습니다. ㎡당 496파운드 받는 동네가 빈 점포 7퍼센트, 91파운드짜리 항구도시가 19퍼센트라니요. 요즘 젊은 분들은 술집이랑 헬스장 빼고는 안 남는다고 걱정하는데, 저는 그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봅니다. 옛날 시장 골목도 물건 파는 집만 있었던 게 아니라 국밥집, 이발소, 만화방이 사람을 붙들어 줬거든요. 우리 동네는 지갑이 얇은 쪽일까요, 사람이 모자란 쪽일까요. -
빗방울
2026.11.01 22:48
술집·식당·헬스장으로 채워지는 거리는 매출이 사람 몸에 묶여 있습니다. 물건을 파는 점포가 빠진 자리를 그 종류로 메운다는 건, 결국 그 동네 사람이 그만큼 먹고 마시고 움직이는 데 돈을 쓴다는 뜻이겠지요. 그 지출을 떠받치는 소득이 줄면 공실률도 따라 올라갈 겁니다. -
빗방울
2026.11.01 23:06
용도 전환 이야기가 제일 재밌더라. 물건 파는 공간이 먹고 만나고 움직이는 공간으로 옮겨갔다는 거, 런던 술집·식당·헬스장 남는 그림이 딱 그렇고. 우리 동네도 반찬가게 자리에 필라테스와 피시방이 들어왔으니까 똑같은 흐름인 셈임. 다만 그렇게 바뀐 가게들은 단가가 올라가서, 동네 사람이 그 거리를 덜 걷게 되는 건 아닌지 궁금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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