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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실 4%인 브라이턴, 9%인 영국 — 상권은 죽은 게 아니라 용도를 바꿨다

빗방울 2026.11.03 11:25 13분 읽기 조회 14 · 추천 2

영국 남부 해안도시 브라이턴(Brighton, 인구 약 28만 명)은 최근 몇 년 동안 “영국에서 가장 쇼핑하기 좋은 도시” 순위 상위권에 꾸준히 오르는 곳이다. 그런데 같은 나라에서 상점가가 비어 간다는 뉴스가 쏟아지는 동안, 이 도시의 전체 소매 공실률은 9%다. 영국 평균은 14%다. 더 좁혀서 소매 점포가 몰린 중심 상업개선지구(BID, business improvement district — 상인들이 자발적으로 조합을 만들어 거리 관리 비용을 함께 내는 구역)로 가면 공실률은 4%까지 떨어진다.

영국 도시 연구자 조너선 미첼(Jon P Mitchell, 서식스대 명예교수)은 2026년 7월 건축·도시 매체 《The Developer》에 이 숫자가 무엇을 가리는지 물었다. 그가 걸은 곳은 브라이턴의 상점가 세 곳이다. 노스레인(North Laine) 골목, 런던 로드(London Road), 그리고 노스 스트리트·처칠 스퀘어 일대. 세 거리는 같은 도시, 같은 시민을 상대하는데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이 글은 그 세 거리를 실마리로 삼아, 한국 독자에게 낯선 영국의 상가 임대 구조와 “상권 몰락”이라는 통념을 다시 읽어 본다.

세 개의 상점가, 세 개의 시간

노스레인은 하나의 큰 길이 아니다. 가드너 스트리트, 켄싱턴 가든스, 시드니 스트리트가 북쪽으로 갈라지는 골목 묶음이다. 빅토리아 시대 건물의 외벽은 알록달록 칠해져 있고, 주말이면 가드너 스트리트에서 차가 끊긴다. 카페 테이블이 길로 나오고 옷걸이가 인도에 늘어선다. 이 거리의 주인공은 체인점이 아니라 독립 상점이다. 1950년대부터 자리 잡은 꽃집, 1970년대부터 운영된 유기농 식료품점, 1990년부터 이어진 채식 신발 가게 같은 오래된 단골 가게가 남아 있다. 상인들은 서로를 알고, 손님은 “무엇을 파는지 아는 사람에게 사는 것”을 이 거리의 값으로 여긴다.

바로 옆 런던 로드는 정반대다. 도심으로 들어가는 간선도로이자 버스 환승 거점이라 사람이 머물지 않고 지나간다. 슈퍼마켓 두 곳, 파운드숍, 테이크아웃 음식점, 자선단체 매장(차리티 숍)이 늘어서 있다. 브라이턴의 다른 가난한 동네 상점가처럼 비어 있지는 않지만, 브라이턴 전체를 봤을 때 소득이 낮은 주민, 노인, 어린 자녀를 둔 가정, 이주민·난민이 주로 이용하는 “뒷무대” 거리다. 현지인의 표현을 빌리면 “노숙자와 약쟁이와 딜리버루”라는 낙인도 붙어 있다.

노스 스트리트·처칠 스퀘어 쪽은 그 사이에 있다. 옷·약국·스포츠용품·휴대폰을 파는 익숙한 체인점과 기념품점이 섞인, 브라이턴판 옥스퍼드 스트리트다. 관광객과 주민이 함께 오는 가장 넓은 층의 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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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드너 스트리트. 노스레인의 세 축 중 하나로, 부분 보행자 구역이자 독립 상점의 밀집지다 — Mat Fascione, CC BY-SA 2.0 (Wikimedia Commons, geograph.org.uk)

영국 상가는 “사는 것”과 “빌리는 것”이 따로 논다

한국 독자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영국 상가의 소유 구조다. 영국의 부동산은 흔히 두 가지 권리로 나뉜다. 하나는 프리홀드(freehold), 땅과 건물을 사실상 영구히 소유하는 권리다. 다른 하나는 리스홀드(leasehold), 일정 기간(상가에서는 보통 10~25년, 주거는 99년·125년짜리도 흔하다) 동안만 사용할 수 있는 임차권이다. 리스홀드 세입자는 건물주에게 ‘그라운드 렌트(ground rent)’라는 땅 사용료를 내고, 리스가 끝나면 건물에 대한 권리를 잃는다.

여기에 상가 임대차의 실무가 얹힌다. 임대차 계약은 보통 풀 리페어링 앤드 인슈어링(full repairing and insuring, FRI) 조건으로 맺어진다. 세입자가 내부 수리뿐 아니라 건물 구조와 외벽 유지보수 비용까지 책임지고 보험료도 부담한다는 뜻이다. 임대료 외에 ‘서비스 차지(service charge)’가 붙고, 계약 갱신 때 임대료를 다시 협상하는 ‘업워드 온리(upward only)’ 갱신이 관행이었다(최근에는 법으로 제한되는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 상가를 얻을 때 목돈을 내는 한국의 보증금·권리금 구조와는 결이 다르다. 영국에는 권리금에 해당하는 제도가 일반화되어 있지 않고, 대신 건물 소유권이나 장기 임차권 자체가 거래 대상이 된다.

이 구조에서 상권을 지키는 열쇠는 “임대료를 내려달라”는 협상이 아니라 “용도를 바꿀 수 있느냐”가 된다. 건물주 입장에서 상가가 비면 임대료를 낮추기보다, 계획 허가(planning permission)를 받아 다른 용도로 바꾸는 편이 낫다. 기사에 이 제도의 세부 수치나 리스 조건은 나오지 않는다. 위 설명은 영국 상가 임대의 일반적 배경이며, 브라이턴 세 거리의 실제 계약 조건은 원문에서 확인되지 않음을 밝혀 둔다.

런던 로드에서 일어난 일: 상가가 학생 기숙사가 되었다

런던 로드 이야기가 이 글의 핵심이다. 브라이턴시는 2000년대 중반부터 이 거리에 재생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2008년 지역 활동팀이 만들어졌고, 2012년에는 영국 정부의 포르타스(Portas) 프로그램에 신청해 8만 3,000파운드를 지원받았다. 외벽과 셔터를 그림과 벽화로 칠한 것도 이 과정의 산물이다. 도시 전체의 낙서(태깅)를 거리 예술로 바꾸려는 시도였다.

더 큰 변화는 외관이 아니라 용도였다. 〈런던 로드 개발 계획〉은 비어 있는 큰 소매 점포를 학생 기숙사로 바꾸는 재인구 유입 전략을 담았다. 상징적인 사례가 옛 코업(Co-op) 백화점이다. 건물은 민간 학생 기숙사로 다시 지어졌고, 개발업자는 거리의 미관을 지키기 위해 옛 백화점 정면을 그대로 남기도록 요구받았다. 이 전환으로 350명이 넘는 학생 주민이 상점가에 새로 살게 됐다. 그 숫자가 음식점과 카페의 수익성을 떠받쳤고, 거리에 헬스장이 문을 열게 했다.

“런던 로드는 정말 활기를 띠고 있다. 10년, 15년 전을 생각하면 … 이제 살아나기 시작했다.” 기사에 인용된 50대 브라이턴 주민의 말이다. 낙인 찍힌 거리의 부활은 체인점 유치도, 임대료 인하도 아닌 거주 인구의 주입에서 시작됐다.

처칠 스퀘어: 쇼핑센터를 가구 회사가 인수했을 때

처칠 스퀘어는 다른 방식으로 살아났다. 원래 이 자리에는 빅토리아 시대 노동자 연립주택이 있었고, 1960년대 ‘슬럼 청소’ 정책으로 1968년에 철거됐다. 그 자리에 콘크리트와 판유리의 야외 쇼핑센터가 들어섰고, 1990년대 초에는 실내 몰로 다시 지어졌다. 두 개의 백화점이 중심이었는데, 영국 백화점 체인 BHS가 2016년, 디벤햄스(Debenhams)가 2021년 각각 무너졌다.

센터의 미래가 불투명했을 때 인수한 곳은 이케아(IKEA)의 모기업 잉카 센트레스(Ingka Centres)다. 이케아는 2025년 8월 이 센터에 매장을 열었다. 그 뒤 센터 안은 통째로 이케아의 색이 됐다. 밖에는 “Hej! Brighton”(안녕, 브라이턴)이라는 노란 표지가 붙었고, 휴게 공간에는 이케아 가구가 놓였으며, 노란 유도선이 매장 입구까지 방문객을 안내한다. 기사에 따르면 방문객이 크게 늘었지만, 보안을 이유로 대규모·청소년 단체의 출입을 제한해 논란도 됐다.

이케아는 브라이턴의 자유주의적 분위기와 자기 회사의 “많은 사람에게 더 나은 일상을”이라는 사명이 맞닿아 있다고 설명했다. 시의 순환경제 정책에 힘을 보태겠다는 약속도 내놨다. 상가 임대 시장의 논리가 아니라, 한 기업의 브랜드가 거리 전체의 정체성을 인수한 사례다.

왜 이 거리들은 버텼나 — 세 가지 연료

기사가 든 브라이턴 상권의 연료는 세 가지다. 첫째, 관광. 브라이턴·호브는 연간 1,100만 명의 방문객을 끌어들이고, 그중 85%가 당일치기 방문객이다. 대부분 런던에서 온다. 둘째, 학생. 두 대학이 3만 7,000명이 넘는 학생을 보유해 전체 인구의 14%를 차지한다. 잉글랜드 나머지 지역 평균인 4%와 비교하면 압도적이다. 셋째, 젊은 층의 문화 소비다. 2021년 인구조사에서 성인 인구의 10% 이상이 LGB+로 자신을 규정했다고 기사는 전한다(잉글랜드·웨일스 평균 3% 수준).

이 세 가지가 서로를 보완한다. 관광객은 노스레인의 개성 있는 가게를 사고, 학생은 저렴한 런던 로드의 테이크아웃과 자선매장을 쓰고, 젊은 층은 빈티지·중고 매장과 윤리적 소비를 지탱한다. 상점가가 살아남은 이유는 저렴한 임대료가 아니라 거리의 소비자를 두 겹으로 확보했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과 방문객이라는 두 방향의 수요가 같은 도로에 겹쳐 있다.

통념을 뒤집는 지점: 몰락이 아니라 용도 전환

“영국 상권은 죽었다”는 말은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영국에서 거의 상식이 됐다. 영국 정부도 2011년 포르타스 보고서, 2013년·2018년 그림지 보고서, 2018년 상권 보고서, 2019~2024년 상권 태스크포스까지 잇달아 대책을 만들었다. 상점 폐업, 업종의 동질화, 유동인구 감소가 문제로 지목됐다.

그런데 브라이턴의 사례는 그 서사의 반대편을 보여준다. 런던 로드가 살아난 방식은 빈 상가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빈 상가를 다른 용도로 바꾸는 것이었다. 처칠 스퀘어가 살아난 방식도 마찬가지다. 백화점이 빠진 자리에 가구 회사의 매장이 들어왔다. 이는 “상권이 무너졌다”가 아니라 “상업의 형태가 바뀌었다”에 가깝다. 쇼핑이 목적이던 거리가, 사는 곳·만나는 곳·머무는 곳으로 기능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 해석에도 반론이 있다. 기사는 학생 재인구 유입이 임시적이고 불안정한 수요에 기대고 있다고 지적한다. 학생 수가 줄면 거리의 활기도 함께 줄 수 있다. 대학 입학 정원과 유학생 정책의 변화가 곧 상권의 변화가 되는 구조다. 또한 한 기업이 간판 쇼핑센터를 쥐고 있는 위험도 기사가 직접 언급한다.

한국과 견주면: 대학가와 신도시 상가

한국에서 이와 가장 가까운 장면은 대학가 상권이다. 대학이 옮겨가거나 정원이 줄면 그 앞 골목의 식당과 카페가 한꺼번에 흔들린다. 서울 신촌이 대표적이다. 대학가 상권은 학생이라는 단일 수요에 기대고, 그 수요가 빠지면 회복이 어렵다. 브라이턴의 런던 로드도 구조는 비슷하다. 다만 다른 점이 두 가지 있다.

첫째, 한국은 상가 임대차에서 보증금과 권리금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상인이 나갈 때 권리금을 회수해야 하므로, 용도를 바꾸는 결정이 임차인과 건물주 사이의 복잡한 협상으로 변한다. 영국처럼 건물을 통째로 기숙사로 돌리는 결정이 상인 협의 없이 이뤄지기는 어렵다. 둘째, 영국은 계획 허가 제도가 강해 용도 전환이 공적 절차를 거친다. 한국은 용도지역 규제가 세밀하지만, 개별 건물의 상가→주거 전환은 상대적으로 유연하게 이뤄지는 측면이 있다. 두 나라 모두 “상권 부활”을 이야기하지만, 실제로는 누가 그 건물의 용도를 결정할 수 있느냐의 문제다.

이 기사가 놓치고 있는 것

이 글의 필자는 영국 도시 연구자이고, 《The Developer》는 건축·부동산 업계를 독자로 삼는 매체다. 기사의 관점은 “공실률이 낮다”는 지표를 출발점으로 삼아 낙관적인 결론에 이르는 구조다. 낙관의 근거는 주로 방문객 수, 학생 수, 인구 구성 같은 수치다. 정작 그 수치가 실제로 어떤 임대 조건 위에서 유지되는지, 상인들이 풀 리페어링 조건에서 수리비를 어떻게 감당하는지, 임대료가 얼마인지는 나오지 않는다.

또한 “공실률 4%”라는 숫자는 빈 점포의 비율일 뿐이다. 같은 자리에 임대료가 얼마나 올랐는지, 상인이 어떤 업종으로 바뀌었는지는 말해주지 않는다. 공실은 줄었지만 상인 구성이 체인점과 프랜차이즈로 바뀌었다면, 그 거리는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교체된 것이다. 기사는 노스레인의 독립 상점을 “오래된 것”으로 자랑하지만, 그 옛 가게들이 지금도 같은 임대 조건으로 버티고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독자에게 묻는다

빈 점포가 없는 거리와, 그 거리에서 오래 장사하는 상인이 남아 있는 거리는 다르다. 우리 동네 상권이 “살아 있다”는 것을 무엇으로 판단해야 할까. 점포 수일까, 임대료일까, 아니면 10년째 같은 간판이 그 자리에 있는가일까. 이 기사의 4%라는 숫자를 우리 동네에 대입하면 어떤 결론이 나올지 궁금하다.

참고 자료

- 플레이스테스트: 브라이턴의 상점가(Placetest: Brighton’s high streets), 《The Developer》, 2026년 7월 1일, https://www.thedeveloper.live/places/placetest/placetest-brightons-high-streets

- 필자: Jon P Mitchell(서식스대 사회인류학 명예교수), 사진: John Sturro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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