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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기 필터는 무엇을 걸러내는가 — 체·표면·압력, 세 가지 다른 방벽

빗방울 2026.11.04 22:30 6분 읽기 조회 14 · 추천 2

새 필터 카트리지를 끼운 날, 컵에 받은 물이 눈에 띄게 맑고 미지근했다. 카트리지 하나가 겨우 주먹만 한데,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기에 냄새가 사라질까.

흔한 설명: 필터는 오염물을 ‘걸러낸다’

정수기 광고를 보면 필터가 체처럼 작동한다는 인상을 준다. 큰 덩어리는 여과지(체)에 남고, 작은 입자는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는 그림이다. 실제로 카트리지 맨 앞에는 5~10마이크로미터 구멍의 부직포가 들어 있어 모래나 녹물 덩어리는 여기서 막힌다.

그런데 물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것들은 그보다 훨씬 작다. 유기 화합물 분자는 1나노미터 정도, 칼슘·나트륨 같은 이온은 0.1나노미터 수준이다. 이온은 물 분자 자체와 크기가 비슷하다. 그러니 체 하나로는 이들을 걸러낼 방법이 없다. ‘걸러낸다’는 표현은 첫 단계에서만 맞고, 그 뒤는 완전히 다른 세 가지 방식이 이어붙어 있다.

1단계, 활성탄: 표면에 붙잡는다

활성탄은 목재나 야자 껍질을 숯으로 만든 뒤 수증기나 인산으로 부활(숯 내부에 구멍을 새로 뚫는 공정)시켜 만든 다공성 탄소다. 구멍이 워낙 촘촘히 뚫려 1그램의 표면적이 3,000제곱미터를 넘는다. 작은 마룻바닥 하나 넓이를 손가락 끝 무게의 탄소에서 얻는 셈이다. 부활 전 숯은 1그램에 2~5제곱미터 정도에 불과하니, 공정이 표면을 수백 배로 늘린다.

물에 녹은 염소, 잔류 농약, 곰팡이 냄새의 원인이 되는 유기물 분자가 이 구멍 안쪽 벽에 달라붙는다. 빨아들이는 것(흡수)이 아니라 표면에 붙는 것(흡착)이라, 분자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면 떨어져 나가기 어렵다. 다만 이건 물리적인 붙잡기다. 자리가 차면 더 붙지 않으므로 표면적이 클수록 오래 버티고, 교체 주기의 기준이 되는 것이 바로 이 ‘자리가 남았는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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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온 교환 수지 구슬(직경 0.5밀리미터 이하). 표면과 내부의 자리에서 이온을 맞바꾼다 — Tomásdearg92,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2단계, 이온 교환 수지: 전하를 맞바꾼다

정수기 일부 모델에는 황갈색 구슬이 담긴 통이 있다. 이 구슬은 직경 0.25~1.4밀리미터 정도의 폴리스티렌 수지이고, 표면과 내부에 이온 교환 자리가 촘촘히 박혀 있다. 칼슘과 마그네슘이 붙어 있는 자리에 나트륨을 내주고 칼슘을 데려가는 식으로, 물속 무기 이온을 다른 이온과 ‘교환’한다.

전부를 걸러내는 게 아니라 바꾸는 것이다. 칼슘은 물에 그대로 남아 있지만, 보일러와 가습기에 흰 때가 끼이게 하는 ‘경도’는 줄어든다. 이온 교환은 자리 수만큼만 할 수 있어 수지가 포화되면 소금물로 재생해야 한다. 가정용 정수기에서 재생 통 없이 쓰는 수지라면, 포화된 뒤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이것이 ‘미네랄 필터’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이기도 하다. 무기 이온을 없애는 게 아니라 종류를 바꾸는 단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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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성탄 가루(왼쪽 아래)와 성형 블록(오른쪽 위). 구멍은 눈에 보이지 않고, 표면적만 수천 제곱미터 — Ravedave, CC BY 2.5 (Wikimedia Commons)

3단계, 역삼투: 압력으로 물만 밀어낸다

가장 작은 것을 걸러내는 단계는 분자 크기로 거른다. 반투막의 한쪽에 물을 넣으면, 원래는 물이 농도가 낮은 쪽에서 높은 쪽으로 스스로 넘어간다(삼투). 이를 거꾸로 돌리려면 삼투압보다 센 압력을 가해 물 분자만 막을 통과시켜야 한다. 실제로 민물·기수는 2~17바, 바닷물은 40~82바의 압력이 필요하다. 바닷물 자체의 자연 삼투압이 약 27바이므로, 그보다 높은 압력으로 밀어야 물이 역방향으로 간다.

바닷물 역삼투의 회수율, 즉 넣은 물 중 식수로 건지는 비율은 최대 50퍼센트이고, 염도가 낮으면 80퍼센트까지 올라간다. 남은 물은 염분이 농축된 채로 배출된다. 그래서 역삼투 모듈은 물을 아끼는 장치가 아니라 물을 쓰는 장치다. 가정용 역삼투 정수기에서 버리는 물이 따로 나오는 이유다. 그리고 대부분의 이온과 분자를 막아버리기 때문에, 역삼투를 거친 물은 다시 미네랄 보충 단계를 거친다.

걸러지는 것과 못 걸러지는 것

세 단계를 겹쳐 놓으면 넓은 스펙트럼을 덮지만, 어떤 필터도 전부는 아니다. 활성탄은 염소와 유기물을 잘 잡지만 질산염처럼 작고 극성이 강한 이온에는 거의 효과가 없다. 역삼투는 이온을 잘 막지만, 물에 녹지 않는 기체와 아주 작은 중성 분자 일부는 통과할 수 있다. 이온 교환 수지는 교환하려는 이온의 종류가 일치해야만 작동한다.

더 근본적인 한계는 미생물의 증식이다. 필터를 오래 쓰면 카트리지 내부에 붙은 유기물을 먹고 세균이 자랄 수 있다. 활성탄은 유기물을 빼앗는 대신, 그 유기물이 사라진 물에 살던 세균이 영양분을 찾아 다시 자리 잡을 수도 있다. 필터를 제때 바꾸라는 안내는 성능이 조금 떨어지는 문제가 아니라, 필터가 오히려 오염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생활에 적용하는 판단

첫째, 교체 시기는 물맛이 아니라 물 사용량으로 정한다. 표면적이 넓은 활성탄도 자리가 차면 끝이라, 정해진 사용량을 넘겨 쓰면 오히려 이득이 줄어든다. 둘째, 역삼투 모델을 고를 때는 ‘무엇을 거르는가’와 함께 버리는 물의 양을 함께 본다. 회수율 50퍼센트면 받는 물의 두 배를 버린다는 뜻이다. 셋째, 미네랄 필터가 붙은 모델은 그 단계가 이온을 더하는 것인지 교환하는 것인지 설명서로 확인한다. 같은 ‘필터’라는 단어가 세 가지 다른 원리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묻습니다

여러분 집 정수기는 카트리지가 몇 개인가. 그중 어느 것이 체이고, 어느 것이 붙잡고, 어느 것이 밀어내는지 설명서에 적혀 있는가.

참고 자료

  • Wikipedia, 「Activated carbon」 — 표면적 3,000 m²/g 이상, 부활 전 숯 2~5 m²/g
  • Wikipedia, 「Reverse osmosis」 — 민물 2~17바, 바닷물 40~82바, 회수율 최대 50%(바닷물)·80%(기수)
  • Wikipedia, 「Ion-exchange resin」 — 구슬 직경 0.25~1.43 mm, 폴리스티렌 기반
  • 한국어 위키백과, 「활성탄」 — 부활(수증기·인산 처리) 공정과 수처리 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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