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남서부 완즈워스(Wandsworth)의 하이스트리트는 이름만 ‘하이스트리트’인 길이다. 2011년 9월 영국 《가디언》이 이 거리를 찾았을 때, 기자는 “점포의 거의 3분의 1이 비어 있는 영국에서 가장 침체된 상점가 중 하나”라는 표현을 썼다. 기사에는 5대째 재단사 가업을 잇는 노(老) 상인의 가게가 “셔터 내린 구석 가게와 판자로 막은 사무실 블록 사이에 서 있다”는 장면이 나온다. 바로 맞은편에는 부동산 중개업자의 간판이 붙어 있었다. “식당 임대, 임대료 인하, 소매·쇼룸 용도 검토 가능(restaurant to let, rent reduced, retail and showroom uses considered).”
같은 주에 나온 짝 기사는 규모를 숫자로 제시한다. 2011년 상반기 기준 영국 하이스트리트 전체로는 일곱 칸 중 한 칸이 셔터를 내렸고, 가장 심한 지역은 세 칸 중 한 칸꼴이었다. 남동부에서 완즈워스보다 공실이 많은 곳은 켄트의 마게이트와 햄프셔의 리 파크 둘뿐이었다. 런던 안에서도 ‘보너스 받는 은행원’이 산다는 동네가 전국 최악 10곳 명단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어느 거리인가 — 이름은 하이스트리트, 실체는 간선도로
완즈워스는 템스강 남쪽, 두 간선도로가 좁은 교차점에서 만나는 곳에 있다. 기사는 이 마을이 “튜더 왕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양조장으로 유명했고, 지금은 교통정체로 악명 높다”고 적었다. 영국의 ‘하이스트리트(high street)’는 특정 도로명이 아니라 도시·마을 중심 상점가를 통칭하는 말이다. 완즈워스 하이스트리트는 상점가라기보다 차가 지나가는 큰길에 가깝고, 그래서 손님이 걷기보다 차로 스쳐 지나간다. 2008년 촬영된 위키미디어 사진을 봐도 이 길의 성격은 분명하다.
기사에 등장하는 77세 주민 실비아 헤이우드는 “작은 가게들이 다 없어지고 있다”며 “이제 식료품점은 슈퍼마켓 말고는 거의 없다”고 말한다. 원문이 든 업종 변화의 근거는 이 정도다. 업종별 점포 수나 매출 비중 같은 통계는 싣지 않았다. 다만 거리의 풍경은 설명된다. 구석 가게는 셔터가 내려가 있고, 사무실 블록은 판자로 막혀 있으며, 양조장과 그 모퉁이 펍은 재개발을 기다리며 버려져 있다. ‘무엇이 사라졌는가’는 통계가 아니라 남은 간판과 빈 셔터로 증언된다.
영국의 상가 임대 제도 — 리스홀드와 프리홀드
한국의 상가 임대차와 영국의 그것은 출발점부터 다르다. 영국 상업용 부동산은 크게 프리홀드(freehold, 토지와 건물의 완전 소유권)와 리스홀드(leasehold, 장기 임차권)로 나뉜다. 상가 임차인은 보통 ‘임대차 계약(lease)’으로 일정 기간 사용권을 얻고, 계약에 정해진 임대료(rent)를 낸다. 한국의 전세처럼 목돈 보증금을 맡기고 월세를 상계하는 구조가 일반적이지 않고, ‘권리금’이라는 제도도 없다. 대신 오랫동안 문제로 지적된 것이 계약 갱신 시 임대료를 올리기만 하는 업워드 온리(upward only) 조항이다.
다만 이 기사에는 임대료 수준, 계약 조건, 권리금 격차에 대한 구체적 내용이 없다. 위 설명은 제도 일반론이며, 완즈워스 개별 점포의 계약 조건은 원문에서 확인되지 않음.
완즈워스 올드 요크 로드 — 기사가 ‘오아시스’라고 부른 거리. 같은 자치구 안에서도 하이스트리트와 정반대의 풍경을 보여준다. — Derek Harper, CC BY-SA 2.0 (Wikimedia Commons / geograph.org.uk)
왜 비었나 — 경제, 주차, 그리고 1970년대의 쇼핑센터
기사가 든 원인은 네 갈래다. 첫째, 경기 침체다. 청소노동자와 철물점 직원은 “사람들에게 돈이 없다, 그게 전부”라고 말한다. 둘째, 주차다. “주차를 할 수 없고, 겨우 미터기를 찾아도 요금이 엄청나다”는 불만이 나온다. 셋째, 더 큰 힘은 시간이다. 5대째 재단사인 패트 차일드는 상권이 죽은 시점을 1970년대 언덜(Arndale, 지금의 사우스사이드) 쇼핑센터가 언덕 아래 문을 연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며, “그 전에는 인도가 붐벼서 사람들이 배수로로 걸어야 했다”고 회고한다. 넷째, 짝 기사가 지목한 아웃오브타운(out-of-town) 쇼핑몰과 온라인 쇼핑이다. 짝 기사에 따르면 도심에 계획된 소매면적 1제곱피트당 교외에는 4제곱피트가 계획되고 있었다.
반전 — 같은 동네, 5분 거리의 다른 거리
이 기사의 진짜 반전은 완즈워스 안에서도 패턴이 고르지 않다는 점이다. 기사는 “불과 5분 거리의 올드 요크 로드(Old York Road)는 가로 카페와 걸이 화분이 늘어선 오아시스”라고 쓴다. 그곳에서 2010년 10월 문을 연 정육점 겸 델리의 주인 앨런 스노는 “갈수록 잘되고 있다”며 “도시 은행원들이 뒤편에 살고, 그들은 우리 가격에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같은 자치구, 같은 시기, 정반대의 두 거리. 그래서 “상권 몰락”이라는 단일 서사는 절반만 맞다. 빈 셔터는 사라짐이 아니라, 아직 다음 용도가 정해지지 않은 상태일 수 있다.
누구의 시각인가 — 기사가 놓친 것
이 기사는 지역 주민과 소상공인의 목소리로 채워져 있다. 대형 부동산 소유주나 체인점 본사의 시각은 짝 기사에서야 등장한다. 그 기사에서 영국부동산연맹(British Property Federation) 대표는 “일부 2차 상업 공간은 더 이상 수익성이 없으니 다른 용도로의 전환을 계획해야 한다”고 말한다. 즉 이 사안에는 ‘상권을 살려야 한다’는 쪽과 ‘용도를 바꾸는 것이 정답’이라는 쪽이 이미 갈려 있었고, 2011년의 기사는 전자에 무게를 두고 있다. 완즈워스의 공실률 “거의 3분의 1”이라는 수치도 조사 기관의 원자료는 짝 기사에만 나온다.
한국과 비교하면 — 신촌과 성수 사이
완즈워스의 풍경은 한국의 신촌·대학로 같은 구도심 상권과 겹친다. 대형 쇼핑몰·온라인·임대료 상승이 겹치며 유동인구가 빠지고, 그 자리에 대체 업종이 들어오지 못하는 모습이 비슷하다. 다른 점은 제도다. 한국은 보증금·권리금·재계약 거절 등 임차인의 부담이 계약 구조에 깊이 새겨져 있고, 영국은 장기 리스와 업워드 온리 조항이 다른 방식으로 임차인을 옥죈다. 또 하나의 차이는 ‘같은 동네 5분 거리의 대비’다. 서울에서도 성수와 인접 골목처럼 용도 전환이 빠른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갈린다. 다만 한 거리를 통째로 바꾸는 카페·델리의 힘이 언제 나타나는지는 시장마다 다르다. 이는 제도 차이에서 오는 일반적 관찰이며, 원문에 직접 비교 데이터는 없다.
독자에게 — 우리 동네는 어느 쪽인가
완즈워스에서 빈 셔터를 세는 일과 올드 요크 로드의 걸이 화분을 세는 일은 같은 동네에서 동시에 일어난다. 여러분이 사는 동네에서 최근 1년간 새로 문을 연 가게는 몇 곳인가. 그리고 닫힌 가게 자리에는 무엇이 들어왔는가. ‘상권이 죽었다’와 ‘용도가 바뀌었다’는 같은 장면을 다르게 읽는 두 개의 문장이다.
참고 자료
· “One third of shops on Wandsworth's once-bustling high street now empty”, 《The Guardian》, 2011년 9월 7일 — https://www.theguardian.com/society/2011/sep/07/wandsworth-shops-empty
· “High streets struggle as shoppers curb spending or drive to out-of-town malls”, 《The Guardian》, 2011년 9월 7일 — https://www.theguardian.com/business/2011/sep/08/high-streets-struggle-shoppers-curb-spending
· 사진: “Old York Road, Wandsworth” — Derek Harper, CC BY-SA 2.0, geograph.org.uk, Wikimedia Commons (2007년 촬영)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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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1.05 13:33
5분 거리 올드 요크 로드가 카페랑 델리로 살아난 게 제일 인상적이네 😅 상권 죽었다는 말은 절반만 맞는 듯
모든 이야기19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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