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1월 6일 오전, 시리아 북부 라카 주의 사막 도로에서 수십 명의 남자가 먼지를 튀기며 줄지어 걸어가고 있었다. 이들은 여성 전사 부대원과 아랍 부족 민병, 쿠르드 인민수비대(YPG) 병력이 섞인 시리아 민주군(SDF) 소속이었다. 차량이 아니라 도보로, 마을 외곽과 사막길을 정찰하며 남쪽으로 내려가는 행군이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약 60킬로미터 남쪽, 당시 이슬람국가(IS)가 스스로 ‘수도’라 부르던 도시 라카였다. 이날 SDF는 라카를 고립시키기 위한 작전을 시작했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어떤 날이었나 — 세 갈래의 진격
작전은 도시를 정면으로 때리는 방식이 아니었다. SDF는 라카 주의 북쪽과 서쪽, 동쪽에서 동시에 압박을 가해 라카로 들어오는 보급로를 끊는 것을 우선했다. 기록에 따르면 첫 주에 북부 전선에서 여러 마을이 함락되었고, 이어서 서쪽의 알타브카로 향하는 축선이 주요 목표로 떠올랐다. 도시를 둘러싸는 원을 그리는 일이 먼저였고, 시가전은 그다음이었다.
이 작전을 이끈 이들은 단일한 정규군이 아니었다. 쿠르드 인민수비대(YPG)를 중심으로 아랍 부족 민병과 아시리아 기독교 민병대, 투르크멘 부대가 느슨하게 묶인 연합이었다. 2015년 10월 창설 당시 이 연합은 ‘민주적이고 세속적인 연방 시리아’를 내걸었다. 하지만 미국의 공중 지원이 없었다면 이 연합은 라카 앞까지 오지 못했을 것이다.
2016년 12월, 라카 북부 시골을 행군하는 시리아 민주군(SDF) 병력. 사진 — Voice of America,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왜 그 시점이었나 — 모술과 라카의 두 축
2016년 가을은 IS에 결정적인 계절이었다. 같은 달 이라크군은 모술 탈환 작전을 개시했고, 이라크와 시리아 사이의 ‘칼리파’ 영토는 양쪽 끝에서 동시에 조여졌다. IS는 전선이 늘어날수록 예비대를 분산해야 했고, 이는 라카 방어에 쓸 병력의 감소를 뜻했다.
이슬람국가는 두 도시를 연결하는 유프라테스 계곡의 통로를 이미 상실해 가고 있었다. 라카로 들어오는 보급의 대부분이 이 계곡과 사막 가도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SDF의 진격은 단순한 영토 확장이 아니라 물류 봉쇄를 노린 계산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연합군의 공습과 SDF의 지상 기동이 같은 축선에서 겹쳐 작동했다.
당시 언론 보도는 이미 라카 외곽의 마을들이 잇달아 비워지고 있다고 전했다. 시민들이 도시로 몰려드는지, 반대로 도시를 떠나는지에 따라 작전의 성패가 갈렸다. SDF는 주민들을 도시 밖으로 유도해 시가전의 부담을 줄이려 했고, IS는 주민을 인질에 가까운 방패로 쓰려 했다.
반전 — 수도로 가는 길목에 있던 댐
라카로 가는 서쪽 길목에는 1970년대 소련의 지원으로 세워진 타브카 댐이 있다. 높이 60미터 남짓의 흙댐으로, 유프라테스 강을 막아 만든 아사드 호의 물을 발전과 관개에 공급해 왔다. SDF가 이 댐을 노린다는 사실은 작전의 성격을 단숨에 드러냈다. 도시 하나를 얻는 것과 시리아 북부 전력과 농업의 상당 부분을 좌우하는 수문 시설을 얻는 것은 차원이 다른 성과였다.
댐은 곧 협상의 대상이자 위협의 대상이 되었다. IS가 댐을 파괴할 수 있다는 공포가 전쟁 내내 반복되었고, 국제기구들은 수위와 구조물 균열을 두고 연신 경고를 냈다. 라카 탈환전의 가장 큰 변수는 시가지가 아니라, 시가지로 들어가기 전에 지나야 하는 이 콘크리트와 흙 구조물이었다.
유프라테스 강을 막아 만든 타브카 댐과 아사드 호의 위성 사진. 사진 — NASA,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경쟁하는 해석 — 누구의 승리였나
첫 번째 해석은 이것을 미국 주도의 대테러 작전의 성과로 본다. 공중 지원과 특수부대 조언단, 무기 보급이 없었다면 쿠르드-아랍 연합이 라카 외곽까지 도달하기 어려웠다는 점은 부인하기 힘들다. 미국은 시리아 내전에서 ‘지상군 없는 전쟁’을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현지 대리 세력을 통해 도시를 점령하는 방식을 택했다.
반론도 강하다. 이 작전을 미국의 대리전으로만 읽으면, 쿠르드 정치 세력이 전후 시리아의 자치 구도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얻은 정치적 자산을 놓치게 된다. SDF가 라카에서 보여준 것은 군사적 신뢰였고, 그 신뢰는 이후 북동 시리아 자치행정의 협상 카드가 되었다. 동시에 이는 터키의 반발을 키웠다. 터키는 YPG를 쿠르드노동자당(PKK)의 연장으로 규정하고, 미국과의 관계에서 이 문제를 계속 쟁점화했다.
세 번째 관점은 이 작전을 지역 균형의 재편으로 읽는다. 라카 탈환은 영토를 되찾는 일이었지만, 동시에 누가 그 영토를 관리할 것인가를 정하는 일이기도 했다. 아랍 부족과 기독교 민병대를 연합에 끌어들인 것은 쿠르드 세력이 단독 지배의 인상을 피하려는 정치적 계산이었다.
사료의 한계 — 전시 기록이 감추는 것
전시 보도는 승리의 순간과 탈환 도시의 모습에 집중한다. 그러나 누가 언제 어떤 명령으로 움직였는지는 흐릿하다. SDF 내부의 지휘 체계는 여러 조직의 연합이라는 성격상 분명하지 않고, 각국 언론의 보도는 자국 정부의 입장에 따라 서로 다른 수치를 제시했다. 민간인 피해와 피란민 이동의 규모 역시 기관별 집계가 크게 갈렸다.
IS 측 기록은 더욱 제한적이다. 선전물은 패배를 은폐하거나 지연시키고, 내부 문서는 대부분 파괴되었다. 따라서 라카 고립의 진행 과정은 상당 부분 연합군 브리핑과 목격자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기록에 따르면”이라는 표현이 남발되는 이유는 이 때문이며, 그 물음표를 지우지 않고 남겨 두는 것이 오히려 정직하다.
지금 우리에게 남긴 것
라카는 2017년 10월에야 함락되었고, 도시의 상당 부분은 폐허가 되었다. 전쟁은 그 뒤로도 계속되어 2024년 12월 아사드 정권의 붕괴로 한 국면이 끝났지만, 시리아 북동부의 자치 문제와 쿠르드 세력의 지위는 여전히 미결이다. 2016년 11월의 진격은 그 긴 이야기의 첫 페이지에 해당한다.
도시에 붙은 ‘수도’라는 이름은 결국 오래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 이름이 사라진 뒤에도 남은 것은 영토의 주인이 누구이며, 그 주인이 어떻게 정당성을 얻는가라는 질문이었다. 무력으로 빼앗은 도시에 어떤 질서를 세울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참고 자료
위키백과 「Raqqa campaign (2016–2017)」 — https://en.wikipedia.org/wiki/Raqqa_campaign_(2016%E2%80%932017)
위키백과 「Syrian Democratic Forces」 — https://en.wikipedia.org/wiki/Syrian_Democratic_Forces
위키백과 「Syrian civil war」 — https://en.wikipedia.org/wiki/Syrian_civil_war
2016년 가을, 라카를 둘러싼 진격 속에서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은 무엇이었다고 보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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