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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27도의 방에서 선풍기를 켜고 5분쯤 누워 있으면, 이불을 다시 끌어올려야 할 만큼 서늘해진다. 그런데 침대 옆 온도계는 여전히 27도에 머물러 있고, 선풍기 날개는 3미터 앞 벽을 향해 똑같은 공기를 계속 밀어내고 있다.

공기가 시원해진다는 착각

많은 사람이 선풍기를 ‘공기를 식히는 기계’로 이해한다. 날개가 무언가를 차갑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방 안의 공기는 선풍기를 켜기 전과 후가 같다. 회전하는 날개와 함께 순환할 뿐이고, 온도계를 방 구석에서 팬 바로 앞으로 옮겨도 눈금은 몇 초 동안 바뀌지 않는다.

선풍기가 하는 일은 공기를 식히는 것이 아니라 공기를 옮기는 것이다. 날개가 압력 차를 만들어 공기를 밀어내면, 방 안의 공기는 커다란 교반기처럼 섞인다. 이 과정에서 온도장(공간마다 다른 온도의 분포)은 평평해지지만, 온도장 전체의 평균은 그대로다. 열역학 제1법칙이 허락하지 않는 일을 가정용 모터 40W로 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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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용 선풍기 — 날개는 공기를 식히지 않고 방 안의 공기를 섞어 보낸다. Melissa Highton,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실제로 확인해 보면

그러면 ‘시원함’은 어디서 오는가. 답은 피부에 있다. 우리 몸은 36.5도 안팎의 열원이고, 그 열은 복사·전도·대류·증발 네 가지 통로로 빠져나간다. 온도계가 ‘느끼지’ 않는 팬은 공기의 열을 빼앗지 못하지만, 피부 위에 고여 있는 얇은 공기층을 떼어내는 데는 뛰어나다.

바람이 0.2m/s로 흐를 때, 기류에 따라 피부 표면의 대류와 증발로 더해지는 냉각은 정지한 공기에서보다 20퍼센트가량 커진다(ASHRAE 55의 같은 조건 기준). 같은 27도 공기라도 피부에 닿는 공기가 계속 갈리면, 피부의 수분이 증발할 공간이 계속 새로 생긴다. 증발은 열을 가져가므로 피부 온도는 내려간다. 정지한 방과 바람이 부는 방의 차이는 공기의 온도 차이가 아니라 열을 실어 나르는 속도의 차이다.

바람의 힘은 어디서 오나

숫자로 확인해 보자. 공기 밀도 1.225kg/㎥인 공기가 3m/s로 흐르면, 1㎥의 공기가 가진 운동에너지는 0.5 × 1.225 × 3² ≈ 5.5줄이다. 같은 흐름이 피부에 부딪힐 때 생기는 동압(정지한 피부가 받는 압력)은 0.5 × 1.225 × 3²/1000 ≈ 5.5 파스칼로, 가볍게 종이를 누르는 정도다. 우리가 느끼는 ‘센 바람’의 물리적 크기는 이렇게 작다.

회전하는 날개는 앞쪽으로 공기를 밀어내고 뒤쪽에 낮은 압력 영역을 만든다. 날개의 기울기(피치)가 만드는 원심력과 압력 차가 기류의 정체다. 날개 회전 자체가 냉각이 아니라 ‘펌프질’이다. 바람이 있다는 사실이 온도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피부 위의 오래된 공기를 새 공기로 갈아 끼우는 것이 냉각의 원인이다.

습도가 이 모든 것을 바꾼다

여기서 결정적인 숫자가 있다. 포화 수증기압, 즉 공기가 더 이상 수증기를 받아들일 수 없는 한계다. 20도에서는 약 2.34 kPa, 25도에서는 약 3.17 kPa, 30도에서는 약 4.24 kPa다. 방의 상대습도가 50퍼센트인 25도 공기 속 수증기는 약 1.6 kPa의 분압을 가져 포화 한계까지 여지가 절반쯤 남지만, 80퍼센트라면 그 여지는 0.6 kPa 아래로 줄어든다. 증발을 밀어낼 여지가 절반 넘게 줄어드는 것이다.

증발이 막히면 바람이 아무리 빨라도 빼앗을 열이 없다. 그래서 장마철 고온다습한 날 선풍기 앞에 서면 오히려 끈적하고, 열대야에 바람이 부는데도 답답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람은 열을 실어 나르는 운송 수단일 뿐이고, 짐(증발할 수 있는 수분)이 없으면 실어 나를 것이 없다.

밀폐된 방의 함정

그렇다면 밀폐된 방에서 오래 켜두면 왜 덥게 느껴질까. 원인은 선풍기 자체보다 그 공간의 열 저장이다. 몸이 내놓는 열은 방 전체에 쌓이고, 선풍기는 그 열을 공기 분자에 실어 방 안을 돌릴 뿐 밖으로 내보내지 못한다. 창 닫힌 방에 사람이 가만히 있어도 체내 대사로 100W 안팎의 열이 계속 공기에 더해진다.

공기 1kg의 비열은 약 1kJ/K이고 물 1kg은 4.2kJ/K다. 벽과 가구의 비열은 공기의 수백 배여서 방의 열 저장고는 거의 전부 공기가 아닌 벽에 있다. 선풍기는 이 저장고의 열을 더 빨리 섞어 피부로 가져오는 역할을 할 뿐이다. 방이 데워지는 원인은 사람과 기기이고, 선풍기는 그 열을 고르게 퍼뜨리는 장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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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만 통풍습도계(사이크로미터) — 젖은 온도계와 마른 온도계의 차이로 습도를 잰다. 젖은 온도계가 낮아진 폭이 곧 증발 냉각의 크기다. CambridgeBayWeather,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이 설명이 틀리는 경우

그러나 모든 경우에 선풍기의 효과가 같지는 않다. 첫째, 공기 온도가 체온보다 높고 습도까지 높은 극한 조건에서는 바람이 오히려 열 스트레스를 키울 수 있다. 40도에 가까운 공기를 피부에 부으면 대류가 열을 ‘받아’ 피부 쪽으로 데우기 때문이다. 둘째, 좁은 방에서는 선풍기가 만드는 기류가 재순환하는 따뜻한 공기를 다시 끌어와 실제 냉각 효과가 줄어든다.

셋째, 모터 발열도 0은 아니다. 40W짜리 모터가 10시간 돌면 약 0.4킬로와트시의 열이 방 안에 남는다. 그 자체는 작지만, 에어컨으로 방을 식힌 상태에서 선풍기를 함께 쓰면 시원함의 상당 부분은 ‘바람의 체감’이지 방의 냉각이 아니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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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만 통풍습도계의 원리 — 젖은 온도계는 증발하며 식고, 그 온도 강하 폭이 공기가 아직 받아들일 수 있는 수증기의 양을 알려준다. CambridgeBayWeather,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생활에 적용되는 판단

첫째, 습도가 높은 날에는 선풍기 속도보다 제습을 먼저 고려하라. 상대습도가 70퍼센트를 넘으면 증발 냉각의 여지가 크지 않아, 같은 전력으로 얻는 시원함이 줄어든다. 둘째, 창문을 조금 열고 선풍기를 바깥쪽으로 향하게 해라. 배기 방향으로 두면 방 안의 열기를 밀어내면서 기압 차로 새 공기가 들어온다. 셋째, 잠잘 때는 팬을 사람에게 직접 향하지 말고 방 전체를 순환시키는 위치에 두어라.

반대로 ‘시원한 느낌’만 원한다면 선풍기는 여전히 효율적이다. 에어컨처럼 압축기를 돌리지 않고 순수한 운동량만으로 피부 냉각을 만든다. 같은 40W로 냉방 효과를 낸다는 사실은 온도계가 보여주지 못하는 진짜 장점이다.

독자에게 묻는다

여러분의 방에서 가장 덥게 느껴지는 순간은 온도계가 높을 때인가, 습도가 높을 때인가. 선풍기 앞에 오래 서 있으면서도 ‘왜 이것이 시원함인지’ 의심해 본 적이 있는가. 그 의심이 바로 이 글의 출발점이었다.

참고 자료

1. ASHRAE Standard 55, Thermal Environmental Conditions for Human Occupancy.
2. ASHRAE Handbook—Fundamentals, Chapter 9 (Thermal Comfort).
3. Tetens, O. (1930), Über einige meteorologische Begriffe, Zeitschrift für Geophysik.
4. Smithsonian Meteorological Tables, 6th ed. (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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