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영국 잉글랜드에서 가장 흔한 간판 하나가 사라졌다. 사우스이스트 잉글랜드의 시장도시 반버리(Banbury) 하이스트리트(High Street) 한가운데, 상점 두 채가 철제 비계로 둘러싸인 채 'FOR SALE' 표지를 내걸고 있었다. 영국 도시의 중심 상업거리, 즉 한국의 '중심 상권'에 해당하는 하이스트리트는 지난 10년간 '죽어가는 거리'의 대표 사례로 인용돼 왔다. 그런데 2026년 2월 19일 부동산 컨설팅 회사 세이빌스(Savills)가 내놓은 분기 리포트는 전혀 다른 숫자를 들고 나왔다.
2025년 4분기 영국 하이스트리트 공실률은 13.4%, 쇼핑센터 공실률은 16.9%로, 둘 다 2020년 3분기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그린스트리트 분석 인용). 같은 해 4분기 하이스트리트·쇼핑센터의 평균 명목 임대료(headline rent)는 £31.09, 실질 임대료(net effective rent)는 £29.81로 2024년 대비 각각 16.1%, 16.4% 올랐다. 2020년 임대료 재조정 이후 새 계약과 비교하면 46.7%, 58.9% 높은 수준이다. '상권 몰락'이라는 서사와 정면으로 부딪히는 숫자다.
임차인이 떠난 자리는 빈 채로 남지 않는다 — 영국의 임대차 제도를 먼저 읽어야 하는 이유
이 숫자를 이해하려면 영국의 상가 임대·소유 구조를 먼저 봐야 한다. 영국 상업용 부동산은 크게 프리홀드(freehold), 즉 토지와 건물을 함께 소유하는 방식과, 리스홀드(leasehold), 즉 일정 기간의 사용권만 사는 방식으로 나뉜다. 소매 점포는 대개 건물주(landlord)가 프리홀드를 쥐고, 사업자는 5년·10년·15년 단위 리스홀드를 임차하는 구조다. 주거용 리스홀드에는 최근 990년으로 사용권을 늘리는 등 강한 법적 보호가 생겼지만, 상업용 리스는 여전히 자유계약(계약서 문구가 사실상 전부) 영역에 가깝다.
한국의 전세·보증금·권리금 구조와 결정적으로 다른 지점은 두 가지다. 첫째, 한국의 상가 임대료는 수익성과 지역 인기 순으로 협상되지만, 영국의 하이스트리트 임대료에는 상업재산세(business rates)라는 제2의 비용이 붙는다. 상업재산세는 정부가 매긴 과세표준가(rateable value)에 지역 계수를 곱해 매기며, 임차인이 직접 부담한다. 둘째, 영국에서는 한국의 권리금에 해당하는 '점포 장악 비용'이 제도화돼 있지 않다. 대신 새 계약 때 건물주가 무상임대기간(rent-free, 렌트프리)이나 인테리어 기여금(capital contribution)을 얹어 주는 방식이 관행이다. 사업자는 권리금을 내는 대신, 몇 달간 임대료를 면제받는 조건으로 장기 계약을 맺는다.
리포트가 말하는 임대료 상승의 진짜 의미는 여기에 있다. 명목 임대료와 실질 임대료가 나란히 올랐다는 것은, 건물주가 '렌트프리와 인테리어 지원으로 임차인을 꾀는' 장치를 예전만큼 쓰지 않고도 계약이 성사되고 있다는 뜻이다. 세이빌스는 이를 두고 '양보가 줄어드는 조건(squeezing incentives)'이라 표현했다. 임대료가 오른 게 아니라, 임대료를 깎아주던 관행이 사라진 것이다. (영국의 리스 구조에 관한 설명은 원문에 없으므로 일반적 배경으로 적었으며, 원문이 직접 다룬 내용이 아님을 밝힌다.)
빈 점포의 진짜 주인은 따로 있다 — 폐업 1만 7천 건의 정체
공실률이 왜 줄었는지에 대한 통념은 '가게가 문을 닫아서'다. 실제로 영국 소매연구센터(CRR)의 2024년 집계에 따르면 점포 폐업은 1만 3,479건에 달했고, 2025년 전망치는 1만 7,349건이었다(다만 2025년 확정치는 아직 발표 전). 1만 7천이라는 숫자만 보면 상권이 붕괴하는 것 같다.
그런데 그 안을 뜯어보면 성격이 다르다. 2024년 폐업 중 공식 파산 절차(insolvency proceedings)에 따른 것은 7,500여 건에 그쳤다. 2020년과 2022년의 정점보다 오히려 줄었다. 늘어난 것은 임대료·세금 부담과 대형 체인의 점포 정리(rationalisation)에 따른 '계획된 철수'다. 2025년 대형 체인의 구조조정과 파산으로 생긴 폐업분은 영국 전체 소매 점포 재고의 약 0.2%에 불과했다. 리버 아일랜드, 파운드랜드, 뉴룩, 셀렉트 같은 체인이 문을 닫은 상당수는 '여기서는 더 이상 장사가 안 된다'는 판단이었고, 그 자리는 비싸고 좋은 위치에 남아 있는 점포를 찾는 다음 사업자에게 넘어갔다.
주목할 만한 사례가 바디케어(Bodycare)다. 2025년 파산한 브랜드 중 문을 완전히 닫은 곳은 이곳뿐이었는데, 전 더바디샵 CEO 찰스 덴턴이 인수한 뒤 30~40개 점포가 새 주인 아래 재개장할 것으로 예상됐다. 나머지 클레어스와 TOFS는 본래 장기 부진에 빠져 있던 브랜드였고, 비용 상승은 원인이 아니라 방아쇠였을 뿐이라고 리포트는 짚는다.
임대료가 오른 곳과 내려간 곳이 뚜렷이 갈린다
리포트가 강조하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평균은 좋아 보이지만 실상은 양극화'라는 점이다. PMA 데이터 기준으로, 주요 도시 중심지의 프라임 존 A(Zone A) 임대료는 2024년 중반 이후 7% 올랐다. 반면 지역 중심지(regional centres)와 일부 도시는 약 2% 성장에 그쳤다. 세이빌스도 2026년 전망에서 초우량(super-prime) 자산의 순초기수익률(net initial yield)을 7.25%, 프라임 9.50%, 도심 우위 자산 10.50%로 제시하며 등급 간 간격을 명시했다.
업종 구성의 변화도 이 편차를 따라간다. 주요 도시, 대표 지역 쇼핑센터, 프라임 구역은 전국 평균보다 훨씬 낮은 공실률을 보이며, 이곳에 들어오는 업종은 가치형 소매업체(value retailers), 식료품 연계 점포(grocery-adjacent occupiers), 뷰티 브랜드, 레저·외식(F&B)다. 반대로 2·3선 지역은 재활용이 아니라 용도 전환이 답이 되고 있다. 복합 용도(mixed-use), 커뮤니티 시설, 편의점형 소매로 바뀌면서 '완전한 소매 목적지'로서의 기능을 일부러 내려놓는 것이다. 상권이 죽은 게 아니라, 소매가 필요한 만큼만 남기는 방향으로 '줄어드는' 중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왜 지금인가 — 세제와 인건비, 그리고 뒤집힌 정책
이 변화의 배경에는 소비 심리와 정책이라는 두 축이 있다. 우선 소비는 '회복'이라기보다 '견디는 중'에 가깝다. 2025년 12월 영국 CPI는 3.4%로 전달의 3.2%에서 다시 올랐고, 영란은행은 같은 해 기준금리를 네 차례 내려 3.75%까지 낮췄다. GfK 소비자신뢰지수는 2025년 12월 -17에서 2026년 1월 -16으로 소폭 올랐지만, 마지막으로 플러스였던 것은 10년 전이다. 리포트는 이를 '낙관이 아니라 회복탄력성'이라 부른다.
정책 쪽은 더 직접적이다. 2026년 4월부터 과세표준가 £50만 초과 대형 상업시설에는 최대 20%의 할증이 붙고, 이 재원으로 £5.1만 미만 소규모 점포는 최대 40%의 감면을 받게 된다. 문제는 과도기다. 2025~26년에는 감면율이 기존 75%에서 40%로 줄어, 대다수 소규모 사업자는 개편이 완성되기 전에 세금을 더 낸다. 정부는 주류업계(pubs)의 반발을 받고 한 차례 입장을 뒤집기도 했다. 여기에 고용주 국민보험료가 13.8%에서 15%로 오르고, 21세 이상 최저임금이 시간당 £12.21로 인상됐다. 인건비 비중이 높은 외식·레저가 가장 먼저 흔들린 이유다.
리포트가 든 외식·레저 통계는 아이러니하다. 2025년 외식·레저 업종은 모든 하위 업종에서 매출이 늘었는데, 거래 건수는 전부 줄었다. 매출 증가가 손님이 늘어서가 아니라 가격이 올라서 발생했다는 뜻이다. 공실이 줄고 임대료가 오르는 동안, 실제로 손님을 받는 사업자의 수익성은 반대 방향으로 눌리고 있다.
역설 — 점포는 줄었는데 임대료는 올랐다
여기서 통념이 한 번 뒤집힌다. 상권 회복의 신호로 읽히는 임대료 상승은 사실 공급이 줄어서 생긴 현상이기도 하다. 영국은 오랫동안 소매 공간이 과잉 상태였고, 그 과잉을 용도 전환으로 걷어내는 중이다. 리포트는 '많은 도시가 더 이상 완전한 소매 목적지일 필요가 없어졌다'고 썼다. 즉 하이스트리트의 회복은 '더 많은 가게가 돌아온 것'이 아니라, '남은 가게의 가치가 올라간 것'이다.
이 지점에서 세이빌스의 시각을 한계와 함께 봐야 한다. 이 리포트는 영국 최대급 상업용 부동산 중개법인이 자사가 중개한 실제 계약(open-market lettings and regears)을 근거로 쓴 문서다. 리포트가 인용한 16%대 임대료 상승은 '세이빌스가 중개한 계약'의 평균이고, 공실률 13.4%는 그린스트리트이라는 민간 분석업체 수치다. 즉 이 글은 잘 팔리는 물건의 가격표를 보여주는 문서에 가깝고, 전국의 모든 골목 상권을 대표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리포트 자신도 '2·3선 지역의 전망은 더 어둡다'고 인정한다. 같은 문서 안에서 '1만 7천 개 폐업'과 '임대료 16% 상승'이 모순 없이 공존하는 이유다.
한국과 견주면 — 명동과 다른 점, 닮은 점
한국의 대표적 중심 상권인 서울 명동을 떠올려 보자. 명동은 코로나 이후 공실률이 50%를 넘었다가 관광객이 돌아오며 빠르게 회복한 사례로 자주 인용된다. 영국의 하이스트리트와 명동은 '중심 상업거리'라는 껍데기는 같지만, 회복의 동력이 정반대다. 명동의 회복은 외국인 관광객이라는 외부 수요가 끌어올린 것이고, 영국 하이스트리트의 회복은 과잉 공간을 걷어내고 생활밀착 수요로 재편한 결과다. 전자는 임대료가 오르면 임차인이 버티기 어렵고, 후자는 임대료가 올라도 남는 업종이 명확하다.
제도적 차이도 크다. 한국은 상가건물임대차보호법이 보증금과 월세 인상률에 상한을 두고, 권리금을 법적으로 인정한다. 영국에는 임대료 상한도, 권리금 개념도 없다. 대신 세금과 인건비가 임차인의 고정비를 결정한다. 그래서 영국에서 '임대료가 올랐다'는 뉴스는 한국에서 '월세가 올랐다'는 뉴스와 같은 의미가 아니다. 영국에서는 세제 개편이, 한국에서는 임대차 계약 갱신이 사업자의 생사를 가른다.
수치를 한국에 그대로 옮겨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한다. 영국의 공실률 13.4%는 '전국 평균'이고, 한국의 상권 공실률은 구역 단위로 집계되는 경우가 많아 비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두 나라의 '상권 건강'을 같은 자로 재려면, 최소한 집계 범위와 기준연도를 먼저 맞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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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 옥스퍼드셔주 반버리의 하이스트리트 — 낡은 상점과 철제 비계가 늘어선 보행자 거리 — Bill Boaden, CC BY-SA 2.0 (Geograph Britain and Ireland / Wikimedia Commons)
상권의 죽음보다 무서운 것 — 조용한 용도 전환
리포트가 그리는 2026년의 그림은 밝지도 어둡지도 않다. 2026년 초 쇼핑센터 투자 시장에는 £8억 7,300만 규모의 17개 자산이 매수 제안 단계에 있었고, 연간 거래액은 £25억을 넘어 2016년 이후 최고치가 될 것으로 전망됐다. 하이스트리트 투자도 2025년 £22억으로 전년 대비 2.1% 감소에 그쳤다. 돈은 돌아오고 있다. 다만 그 돈은 초우량 자산과 대형 자산으로 몰리고, 소규모 지역 상권에는 오지 않는다.
영국에서 '상권이 회복됐다'는 헤드라인을 읽을 때 가장 먼저 물어야 할 것은 '어느 동네의 이야기인가'다. 어떤 거리는 임대료가 오르고 비어 있던 자리에 뷰티숍과 베이커리가 들어온다. 어떤 거리는 소매 기능을 내려놓고 진료소와 주민센터로 바뀐다. 둘 다 '회복'이라 불릴 수 있지만, 그 안에 남은 사업자에게는 전혀 다른 미래다.
여러분이 사는 동네의 중심 거리는 어느 쪽에 가까운가. 임대료가 오르는 것을 회복의 신호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마지막으로 남은 사업자가 밀려나는 소리로 들을 것인가. 그 판단은 평균 통계가 아니라, 여러분 동네 빈 점포의 숫자와 그 점포에 붙은 '임대 문의' 전화번호가 대신 말해 줄 것이다.
참고 자료
- Savills, 「Spotlight: Shopping Centre and High Street – Q4 2025」, 2026년 2월 19일 — 원문 링크
- 이미지: High Street, Banbury(2022) — Bill Boaden, CC BY-SA 2.0, via Geograph Britain and Ireland / Wikimedia Commons
댓글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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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1.01 03:02
임대료가 올랐다는 말이 '자리를 얻으려는 사람이 늘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는 대목에서 멈칫했습니다. 저는 당연히 장사가 안 돼서 월세를 내렸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렌트프리가 줄어든 쪽이 실질 부담은 더 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 동네 골목은 진료소로 바뀌는 쪽인지 궁금하네요. -
빗방울
2026.11.01 03:40
렌트프리와 인테리어 지원이 줄었다는 대목에서 멈칫했습니다. 임대료 숫자만 보면 몰락이 아니라 호황 같아서요. 그런데 옆 동네처럼 소매를 포기하고 진료소나 주민센터로 바뀌는 거리는, 사업자 입장에선 회복이 아니라 퇴장 통보처럼 느껴지지 않을까요. 서울에서도 재개발 전 상가들이 딱 그런 모양이었던 기억이 납니다. -
빗방울
2026.11.01 05:10
'임대료가 오른 게 아니라 깎아주던 관행이 사라진 것'이라는 대목에서 멈칫했습니다. 사장님 입장에서는 결국 내는 돈이 늘어난 건 마찬가지인데, 통계에는 '회복'으로 찍히니까요. 저희 동네 골목도 빈 점포마다 같은 부동산 전화번호가 붙어 있는데, 그 숫자가 어디로 옮겨가는 사람들의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
빗방울
2026.11.01 05:24
임대료가 올랐다는 뉴스만 보면 사업자들이 더 힘들어졌다는 뜻인 줄 알았는데, 렌트프리와 인테리어 지원이 줄어든 걸 두고 하는 말이라는 대목에서 멈칫했습니다. 저희 동네에도 가게는 계속 바뀌는데 같은 자리가 미용실, 약국, 편의점으로만 돌아가더군요. 혹시 이런 용도 전환은 지역 주민 입장에서 생활이 편해지는 쪽으로 작용하는 걸까요, 아니면 골목마다 비슷비슷해지는 걸까요? -
빗방울
2026.11.01 08:44
임대료 오르고 폐업 늘면 결국 용도가 바뀌는 수밖에. 읽었습니다.
모든 이야기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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