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1월 2일 오후, 연세대 AI혁신연구원 세미나실. 재정경제부 전략경제자문단과 연세대 디지털헬스연구원·AI혁신연구원이 50여 명을 모아 포럼을 열었다. 제목은 「의료데이터의 안전한 학습·검증·활용을 위한 국가 AI 인프라 구축」. 이 자리에서 나온 말 중 가장 실무적인 문장은 행사 소개가 아니라 김재용 국민건강보험공단 빅데이터운영실장의 발제에 있었다. 공단이 보유한 국민 건강정보 DB에 병원 임상데이터를 연계하겠다, 그리고 그 첫 단계로 2027년 상반기 임상자료 반입·결합 시범사업을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이 한 줄이 이 포럼의 실체다. 의료 AI의 병목이 알고리즘이 아니라 데이터가 병원 담장을 넘지 못하는 구조에 있다는 진단, 그리고 그 담장에 문을 하나 내겠다는 계획이다. 확정된 제도가 아니라 공개된 방향과 시범사업 예고에 가깝다는 점을 먼저 못 박아 둔다.
왜 지금 의료데이터인가
포럼 발제자 구성이 답을 대신한다. 보건복지부 의료인공지능데이터정책과장이 나와 「AI 대전환 시대, 대한민국 보건의료 혁신과 의료 AX 전략」을 설명하고, 여기서 지역·필수의료 공백 해소를 위한 「AI 기본의료 전략」의 3대 전략·12대 정책과제와 공공의료 AI 고속도로의 연차별 추진계획이 소개됐다. 정부가 이미 정책 목표를 세워 두었고, 남은 문제는 그 목표를 돌릴 연료, 즉 데이터라는 뜻이다.
배경에는 두 가지 압력이 겹쳐 있다. 하나는 지역·필수의료 인력 부족으로 AI 진단·보조에 대한 기대가 커진 것이다. 다른 하나는 개인정보 규제다. 의료정보는 민감정보로 분류되어 목적 외 이용이 원칙적으로 막혀 있고, 그래서 병원은 데이터를 연구용으로 내놓기 어렵고 기업은 학습시킬 자료를 확보하기 어렵다. 박영선 전략경제자문단 위원장이 개회사에서 「공통 표준과 안전한 연계체계」와 「프라이버시 강화 기술」을 강조한 것도 이 지점을 겨냥한다.
참고로 이 포럼은 재정경제부가 주최 측이다. 보건복지부나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아니라 경제부처가 의료데이터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안을 규제 문제가 아니라 산업 문제로 다루겠다는 신호로 읽힌다.
논의된 네 가지 기술적 경로
발제는 네 갈래였다. 각각이 「데이터를 어떻게 쓰느냐」에 대한 서로 다른 답이다.
1) 건강보험 빅데이터 + 병원 임상자료 결합 —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이미 전 국민의 진료내역·처방·검사 데이터를 갖고 있다. 다만 여기에는 병원 내부의 상세한 임상기록(검사 수치, 영상 판독, 병기 등)이 없다. 공단의 안전분석 인프라에 병원 임상데이터를 얹으면 전 국민 규모이면서 임상적으로 깊은 데이터가 만들어진다. 시범사업은 2027년 상반기, 이후 관계기관 공동 운영과 데이터 연계 확대가 예고됐다. 반출 심사·활용 금지 기준 같은 신뢰 확보 장치도 함께 제안됐다.
2) 동형암호 기반 공동 활용 — 서울대 천정희 교수(동형암호 분야의 대표 연구자)는 데이터를 암호화한 상태 그대로 연산하는 기술로 여러 병원의 자료를 합쳐 분석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암호를 푸는 순간이 없으니 원본이 노출되지 않는다. 암호화된 상태의 연합학습과 통계 분석의 성능 및 적용 사례가 함께 소개됐다. 대가는 계산 비용과 속도다.
3) 표준 기반 「반출 없는」 활용 — 연세대 유승찬 교수는 진료용 국제표준 FHIR과 연구용 공통데이터모형 OMOP-CDM을 축으로 한 5개 과제를 소개했다. 데이터를 표준 형식으로 맞춰 두면, 굳이 병원 밖으로 꺼내지 않고 각 기관 안에서 분석을 돌릴 수 있다. 아울러 범부처 협의체로 중복 투자를 막고 제도 개선을 병행하자고 제안했다.
4) 현장의 AI 적용 — 금기창 연세대 의무부총장 겸 의료원장은 임상기록 작성 지원, 진료대화 자동 정리 같은 연세의료원의 실제 사례를 들며, 데이터를 안전하게 다루는 것이 현장 적용의 출발점이라고 했다.
「의료데이터의 안전한 학습·검증·활용을 위한 국가 AI 인프라 구축」 포럼 보도자료 — 정책브리핑(korea.kr) 화면 캡처, 재정경제부, 2026.11.2.
누가 얻고 누가 잃는가
얻는 쪽 — 중소 바이오·헬스케어 스타트업. 대형 병원 네트워크나 자체 데이터 규모를 갖춘 대기업과 달리, 중소기업은 학습용 의료 데이터를 구할 방법이 거의 없었다. 국가 인프라가 공개되면 이 격차가 줄어든다. 박영선 위원장이 개회사에서 「성과가 중소기업과 스타트업에도 확산되어야 한다」고 덧붙인 대목이 이것이다.
얻는 쪽 — 상급종합병원. 데이터 보유 병원은 공동 연구의 파트너로서 협상력과 연구 성과를 동시에 얻는다. 다만 이득은 「참여 조건」에 달려 있다. 데이터를 내놓는 병원이 분석 결과에 대한 권리를 어디까지 갖는지가 공개되지 않았으니, 이 조건이 실제 배분을 결정할 것이다.
잃는 쪽 — 실질적 통제권을 갖고 있던 병원과 데이터 중개업. 병원이 데이터를 「반출하지 않고」 분석이 가능해지면, 데이터를 직접 사고팔거나 중개하던 기존 사업의 존재 이유가 흔들린다. 병원 입장에서도 데이터가 자기 통제 밖의 국가 인프라로 흘러가는 것에 대한 반발이 나올 수 있다.
부담 지는 쪽 — 규제·감독기관. 개인정보보호위원회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토론에 참여한 이유다. 데이터가 커질수록 유출·오용 위험과 이를 심사할 인력 부담도 함께 커진다.
환자. 이득은 「더 나은 진단·치료」라는 간접적 형태로, 위험은 「내 진료기록이 어디까지 쓰이는가」라는 직접적 형태로 온다. 이 비대칭이 논의의 급소다.
통념과 다른 지점
통상 의료 AI 논의는 「데이터를 얼마나 많이 모으나」로 흐른다. 이 포럼의 답은 반대다. 데이터를 꺼내지 않고 쓰는 쪽이다. 동형암호든, 각 기관 내 분석이든, 반출 심사·금지 기준이든, 모두 「데이터를 병원 밖으로 보내지 않겠다」는 전제 위에 서 있다.
두 번째로 눈에 띄는 것은 수단의 성격이다. 정부가 법이나 제도를 먼저 고치지 않고 시범사업을 먼저 예고했다. 2027년 상반기라는 시점은 제도 정비가 그 전에 끝나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반대로 그때까지 결론이 안 나면 또 미뤄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세 번째는 참석 규모다. 청중을 포함해 50여 명 내외의 소규모 포럼이다. 이 자리에서 확정된 것은 없고, 재정경제부 스스로도 「관계부처와 함께 정책 과제를 지속 모색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발표문의 무게를 과대평가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해결하지 못하는 것
구체적 기준이 아직 없다. 반출 심사 절차, 활용 금지 범위, 데이터 제공에 대한 보상 규정 — 모두 「제안」 또는 「마련」 단계로만 언급됐다. 숫자와 기준이 담긴 문서는 이번 보도자료에 없다. 확인되지 않음.
환자의 동의 구조가 드러나지 않았다. 전 국민 규모 데이터를 결합하는 사업에서 개인별 동의를 어떻게 처리할지(사전 동의, 목적별 동의, 가명처리 후 공익적 이용)는 공개된 내용에 없다. 이 부분이 빠진 채로 시범사업이 먼저 돌면, 이후에 같은 논쟁을 다시 하게 된다.
비용·성능의 현실. 동형암호는 계산 비용이 크다. 암호화된 상태의 연산 성능이 실제 대규모 임상 데이터에서 어느 정도인지는 이 자리에서 수치로 제시되지 않았다. 확인되지 않음.
지방·중소병원의 참여 유인. 표준 형식(FHIR·OMOP)으로 데이터를 정비하는 데는 병원마다 상당한 비용이 든다. 규모가 작은 병원일수록 그 비용을 감당하기 어렵고, 그러면 데이터는 다시 큰 병원 쪽으로 쏠린다. 데이터 격차를 줄이려는 정책이 데이터 격차를 재생산할 위험이 있다.
AI 오류의 책임. 김구년 국가바이오혁신위원회 지원단장이 「AI 분석 결과에 대한 충분한 검증과 책임 있는 운영체계」를 강조했을 뿐, 오진이 발생했을 때 책임이 의사·병원·개발사 중 누구에게 가는지는 정리되지 않았다.
독자가 할 일
일반 독자가 당장 신청할 것은 없다. 이번 건은 신청형 지원사업이 아니라 정책 포럼이다.
다만 두 가지만 알아 두면 쓸모가 있다. 첫째, 건강보험공단의 데이터 활용은 이미 공단 빅데이터 이용 신청 절차로 운영되고 있다. 2027년 시범사업이 시작되면 병원 임상자료 연계 범위가 이 창구와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관건이니, 관심 있는 연구자나 기업은 공단 빅데이터 포털의 공지와 보건복지부 「AI 기본의료 전략」 후속 자료를 확인하면 된다.
둘째, 자신의 진료기록이 어디에 쓰이는지에 민감한 사람은 민감정보 처리와 가명정보 결합에 대한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기준을 미리 읽어 두는 편이 낫다. 시범사업의 구체적 설계가 나올 때 그 기준과 비교하면 무엇이 바뀌었는지 바로 보인다.
자료의 한계
이 글의 근거는 재정경제부가 배포한 보도자료 한 건이다. 보도자료는 주최 측이 자기 행사의 취지와 성과를 정리한 문서다. 따라서 ① 토론에서 나온 반대 의견과 이견이 사실상 빠져 있고, ② 참석자 발언이 모두 협조적인 인용 형태로 정리되어 있으며, ③ 시범사업의 예산 규모·주무 부처 확정 여부·법 개정 필요성 같은 행정적 쟁점은 다뤄지지 않는다.
특히 종합토론(16:05~16:55, 50분)에 개인정보보호위원회, 건강보험심사평가원, LG AI연구원이 참여했는데 이 토론 내용은 보도자료에 거의 담기지 않았다. 실제 쟁점은 그 50분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의료계·환자단체·시민사회의 반대 논거는 이 자료만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참고 자료
· 재정경제부, 「의료데이터의 안전한 학습·검증·활용을 위한 국가 AI 인프라 구축」 포럼 개최, 2026년 11월 2일 배포(보도시점 17:00)
· 정책브리핑(korea.kr): https://www.korea.kr/briefing/pressReleaseView.do?newsId=156787615
· 담당: 재정경제부 전략경제정책관 인공지능경제과 (044-215-4991)
여러분은 병원 진료기록이 연구에 쓰이는 것을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가명처리 후 공익 연구라면 괜찮다고 보시는지, 아니면 건별 동의가 있어야 한다고 보시는지 궁금합니다.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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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1.02 21:56
동형암호 쪽 비용 얘기는 계속 나오는데 성능 수치가 없으니 반쪽짜리 설명이긴 함ㅋㅋ 반출 안 하고 기관 안에서 돌리는 OMOP 방식이 현실적으로 먼저 갈 듯. 근데 그거 정비 비용을 중소병원이 못 대면 결국 큰 병원 데이터만 남는 거 아님? 데이터 격차 줄인다고 만든 인프라가 격차 키우면 좀 웃기지 않나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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