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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3월 28일, 영국 에식스 주 에핑(Epping)의 하이 스트리트에 있는 가게 유리창에는 여전히 '세일 진행 중'이라는 빨간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이 간판이 달린 건물 자체는 1800년대 말부터 마을 중심가에 서 있던 상점가의 일부다. 그런데 그 간판, 'WHSmith'라는 이름이 영국의 거리에서 사라진다는 소식이 같은 날 발표됐다. 회사는 하이스트리트 사업부를 사모펀드 모델라 캐피털(Modella Capital)에 넘기기로 했고, 새 주인은 이 480개 점포를 '티지존스(TG Jones)'라는 새 이름으로 바꾸겠다고 밝혔다. 항공업계가 아니라 유통업계의 일이지만, 이 결정은 영국 도시의 '거리'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이 글은 BBC가 2025년 3월 보도한 'WH Smith name to disappear from High Street after sale'을 원문으로 삼는다. 당초 후보로 잡았던 선데이타임스 칼럼(로버트 콜바일)은 유료 장벽에 막혀 본문 확인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제목만으로 내용을 추정하지 않고 읽을 수 있는 원문으로 갈아탔다.

영국 '하이 스트리트'란 무엇인가 — 마을의 얼굴이자, 임대 구조의 산물

하이스트리트(high street)는 영국에서 '마을이나 도시의 중심 상업 거리'를 뜻하는 일반명사다. 우리말로 옮기면 '중심 상권'이나 '번화가'에 가깝지만, 실제로는 지리적 개념이라기보다 소유·임대 구조가 만든 결과물이라는 점이 다르다. 영국의 상가는 대개 프리홀드(freehold, 토지와 건물의 완전 소유권)를 가진 지주가 땅을 보유하고, 그 위에 리스홀드(leasehold, 장기 임차권)나 상업용 임대차 계약을 얹는 구조로 운영된다. 우리나라의 전세·보증금·권리금 체계와는 출발점부터 다르다. 한국에서는 임차인이 보증금을 맡기고 장사가 잘 되는 자리의 '영업권'에 권리금을 얹어 다음 임차인에게 넘기는 관행이 발달했지만, 영국 하이스트리트의 상점은 대개 짧은 기간의 상업 임대차(short lease)로 굴러간다. BBC가 인용한 리테일 이코노믹스(Retail Economics)의 니콜라스 파운드는 "WH 스미스 매장은 통상 짧은 임대차 계약을 맺고 있어, 수익성이 낮은 매장을 정리할 여지가 크다"고 설명했다. 임차인이 오래 붙잡을수록 협상력이 생기는 한국의 권리금 시장과 달리, 짧은 계약은 임대인과 새 사업자에게 빠른 교체의 자유를 준다. 빈 점포가 '몰락'이 아니라 '교체'로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480개 점포, 5,000명 — 숫자로 본 이번 거래

원문이 전하는 거래의 규모는 이렇다. 모델라는 리테일파크, 쇼핑센터, 하이스트리트에 걸쳐 480개 매장과 5,000명의 직원을 인수한다. 새 주인은 기존 우체국 카운터 195곳과 토이저러스(Toys "R" Us) 입점 공간은 유지하겠다고 했고, 영업은 당분간 '평소와 다름없이(business as usual)' 진행된다고 밝혔다. 다만 모델라는 감원 여부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고, 유통 분석가들은 사모펀드가 인수한 매장의 실적을 면밀히 들여다볼 것으로 내다봤다.

여기서 눈여겨볼 숫자는 점포 수가 아니라 매출의 출처다. 원문에 따르면 WH 스미스의 '트래블' 사업부는 2024년 그룹 매출의 75%, 영업이익의 85%를 차지했다. 공항·기차역·병원 안의 매장이 회사의 심장이 된 것이다. 거리의 480개 점포는 매출의 나머지 4분의 1을 만드는 사업이었다는 뜻이 된다. 파운드는 트래블 부문의 상품 구성(식음료, 기술 제품 등)이 "바쁜 환승 거점에서의 충동 구매에 더 잘 맞는다"고 분석했다.

왜 하필 '이름'이 사라지는가 — 브랜드와 부동산은 따로 팔린다

이번 거래에서 흥미로운 지점은 WH 스미스라는 이름 자체는 팔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상표는 회사에 남아 공항·역·병원 매장에 계속 쓰이고, 하이스트리트 매장만 새 이름 '티지존스'로 갈아입는다. 새 주인이 이름을 고른 이유로 내세운 것은 WH 스미스가 가진 '가족적인 느낌'과 같은 결이었다고 한다. 즉 이건 브랜드의 죽음이 아니라 브랜드의 분할이다. 같은 이름을 쓰던 두 사업이 서로 다른 소유자, 다른 임대 구조, 다른 고객층으로 갈라지는 사건이다. 한국 독자에게는 낯설 수 있지만, 실제로 국내에서도 대기업이 특정 사업부만 떼어내 매각하면서 상호 사용권을 나누는 일이 흔하다. 다른 점은 영국에서는 그 분할이 거리의 경관으로 즉시 드러난다는 것이다.

업종 구성의 변화 — 문구점에서 '공간'으로

원문이 직접 제시하는 업종 데이터는 제한적이다. 다만 확인되는 것은 새 주인이 하이스트리트 매장에 새 상품군을 추가하고, 특히 모델라가 보유한 공예 브랜드 하비크래프트(Hobbycraft)의 상품을 거리 매장으로 끌어들일 가능성이다. 유통 컨설턴트 캐서린 셔틀워스는 "공간을 새 주인이 어떻게 쓸지 지켜봐야 하지만, 하비크래프트가 하이스트리트 판매로 진출해 공예에 관심 있는 젊은 고객을 겨냥할 기회가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 문구·잡지·담배를 파는 '편의형 잡화점'에서 취미·체험형 공간으로의 이동이다. 이는 영국 상권 전반에서 관찰되는 흐름(카페, 미용, 헬스, 공예 등 '머무는 업종'의 증가)과 방향이 같다. 다만 이 기사에는 공실률이나 업종별 매출 비중 같은 수치가 없으므로, 그 부분은 원문에서 확인되지 않음을 밝혀둔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나 — 짧은 임대차, 이커머스, 그리고 '여행지로서의 상권'

원문이 제시하는 원인은 세 갈래다. 첫째, 임대차 구조다. 짧은 계약은 임대인이 임차인을 쉽게 바꿀 수 있게 하고, 그만큼 점포의 용도 전환이 빠르다. 둘째, 이커머스와 소비 패턴의 이동이다. 파운드가 지적한 대로 WH 스미스의 강점은 이제 '환승 거점에서의 충동 구매'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걷는 거리보다, 이동 중 잠깐 머무는 공간에서 돈을 쓴다. 셋째, 투자 여력의 문제다. 파운드는 "많은 하이스트리트 입지가 오랫동안 최소한의 투자만 받아온 탓에 값비싼 보수가 절실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는 임대료가 비싸서가 아니라, 건물 자체가 낡아서 손님이 떠나는 경우가 많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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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에식스 주 에핑의 하이 스트리트에 있는 WH 스미스 매장(2021년 4월). 2025년 이 체인의 하이스트리트 매장은 '티지존스'로 이름을 바꿨다. — Mutney,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반전 — '상권 몰락'이 아니라 '용도 전환'

이 사건을 '영국 상권의 죽음'으로 읽는 것은 성급하다. 원문이 실제로 말하는 것은 한 사업자의 철수와 다른 사업자의 진입이다. 480개 점포는 문을 닫는 것이 아니라 새 이름, 새 상품, 새 임차 조건으로 다시 열린다. 물론 5,000명의 고용이 그대로 유지될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적어도 이 거래의 구조는 "가게가 사라진다"가 아니라 "가게의 쓰임이 바뀐다"에 가깝다. 이 지점이 한국 독자에게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흔히 상권 쇠퇴를 점포 수의 감소로만 세기 때문이다. 점포 수가 줄지 않아도 업종이 바뀌면 체감 경기는 나빠지고, 업종이 바뀌어도 임대료는 오른다. 영국의 사례는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일어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한국과 비교 — 대학가·골목상권과 무엇이 같고 다른가

비슷한 처지의 국내 상권으로 서울 신촌이나 지방 대학가를 들 수 있다. 두 곳 모두 '유동인구가 줄었는데 임대료는 잘 안 내려간다'는 문제를 공유한다. 다른 점은 두 가지다. 첫째, 소유 구조다. 한국의 골목 상가는 건물주 개인이 다수이고, 임차인은 보증금과 권리금을 통해 자리 자체에 투자한다. 그래서 점포 교체가 느리고, 한 번 비면 오래 빈다. 영국의 짧은 임대차는 교체가 빠른 대신 임차인의 안정성이 낮다. 둘째, 정책의 초점이다. 영국은 체인점의 철수를 민간 거래로 처리하지만, 한국은 골목상권·전통시장을 대상으로 임대료 지원, 상권 활성화 사업 같은 공적 개입을 병행한다. 어느 쪽이 낫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빈 점포를 어떻게 채울까'라는 질문과 '임차인이 버틸 수 있게 할까'라는 질문은 서로 다른 정책을 요구한다.

사료의 한계 — 이 기사는 누구의 시각인가

이 글의 1차 사료는 BBC의 보도다. BBC는 인수자(모델라)의 발표, 유통 컨설턴트 세 명의 코멘트, 그리고 시장 분석을 함께 실었지만, 임차인이나 매장 직원의 목소리는 담기지 않았다. 인수자는 "평소와 다름없이"라고 했고, 감원 여부는 "언급하지 않았다". 즉 이 기사는 거래의 구조와 업계의 해석에는 강하지만, 그 거래가 현장에서 어떻게 체감되는지에는 약하다. 또한 하이스트리트 매장의 실제 매출 규모, 공실률, 임대료 수준은 이 기사에 수치로 제시되지 않는다. 그런 숫자를 인용하려면 별도의 통계 출처가 필요하다. 이 글은 원문에 없는 수치를 만들어 쓰지 않았다.

독자에게 — 당신 동네의 '하이 스트리트'는 지금 무엇으로 바뀌고 있나

영국에서 180년 넘게 거리의 얼굴이던 간판이 내려갔다. 그 자리에 무엇이 들어올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우리 동네라면 어땠을까. 문을 닫은 문구점 자리에 공예 공방이 들어오는 것이 '상권의 회복'일까, '상권의 변질'일까. 임대료가 오르지 않아도 손님이 바뀌면 동네는 바뀐다. 당신이 사는 동네에서 최근 5년 사이 가장 많이 사라진 업종과 가장 많이 생긴 업종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 변화는 임대료 때문이었나, 손님 때문이었나.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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