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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0월 런던 옥스퍼드 스트리트 214번지. 파란 타일 외벽 위로 석회암 파사드가 남아 있고, 그 위에 'TOPSHOP'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자국만 희미하게 보인다. 간판은 떼어졌지만 돌에 파인 브랜드 이름은 지워지지 않았다. 이 건물은 한때 유럽에서 가장 큰 패션 플래그십 매장 중 하나였고, 2021년 봄 코로나19 봉쇄 국면에서 마지막 매장이 닫혔다. 2019년 영국 전역에서 톱샵이 쓰던 점포는 200곳에 조금 못 미쳤다. 그중 상당수는 톱맨(Topman) 남성복도 함께 팔던 공간이었고, 아르카디아 그룹 전체로는 약 350만 평방피트의 영업면적이 함께 사라졌다.

6년이 지난 지금, 그 빈자리는 어떻게 됐을까. 부동산 컨설팅 회사 사빌스(Savills)가 2025년 1분기 보고서에서 옛 톱샵 점포를 하나하나 추적한 결과는 단순한 '상권 몰락' 서사와 조금 다르다. 절반 이상은 새 주인을 찾았고, 절반에 가까운 점포는 여전히 비어 있다. 문제는 어느 쪽이 비었는가다.

옥스퍼드 스트리트의 간판이 사라진 자리, 숫자로 다시 세다

사빌스는 2019년 당시 톱샵이 점유했던 점포 가운데 형태가 크게 바뀌지 않은 것들을 기준으로 집계했다. 그중 18%는 용도가 바뀌거나 구조가 개조되어 별도로 분류됐다. 남은 재고를 기준으로 보면 58%가 다른 임차인에게 재임대됐다. 패션 업종이 그 절반을 조금 넘게 차지했고, JD스포츠, 넥스트, 플래널스 같은 브랜드가 케임브리지, 길퍼드, 더비 같은 도시에서 옛 톱샵 자리에 들어갔다.

JD스포츠는 아르카디아 전체 부지에서 16곳을 가져가, 단일 브랜드로는 가장 많은 점포를 흡수했다. 시내 매장과 교외 리테일파크를 가리지 않았다. 두 번째로 큰 업종은 비교구매재(comparison goods)로 31%였다. 마운틴 웨어하우스, 쇠스트레네 그뢴, 워터스톤스 같은 브랜드가 평균보다 큰 면적과 눈에 띄는 입지를 활용해 들어왔다. 나머지는 편의점, 식음료, 헬스앤뷰티, 서비스 업종이 섞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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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옥스퍼드 스트리트 214번지, 간판을 떼어낸 뒤에도 돌에 남은 TOP SHOP 각인(2024년 10월) — Matt Brown, CC BY 2.0 (Wikimedia Commons)

영국의 상가 임대 제도 — 보증금도 권리금도 없는 대신, 계약이 전부다

한국 독자에게 이 숫자를 읽는 열쇠는 임대 구조다. 한국의 상가 임대차는 보증금과 매월 임대료, 그리고 시설·영업권을 사고파는 권리금으로 구성된다.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이 계약갱신요구권과 우선변제권을 보장하고, 5년의 갱신 기간을 보장한다. 반면 영국의 상업용 부동산 임대는 주로 임대인과 임차인 간 자유계약으로 이뤄진다. 사빌스 보고서가 다루는 '헤드라인 임대료(headline rent)'는 계약서에 적힌 명목 임대료를, '순실효 임대료(net effective rent)'는 무상 임대 기간(rent-free period)이나 임차인 공사비 지원 같은 인센티브를 반영한 실질 임대료를 뜻한다.

이번 보고서에서 헤드라인 임대료는 3.1%, 순실효 임대료는 2.6% 하락했다. 명목 임대료보다 실질 임대료가 덜 떨어졌다는 것은, 임대인이 인센티브를 줄여 실질 수익을 방어했다는 뜻으로 읽힌다. 영국 상업 임대차는 통상 10년 이상 장기 계약에 5년차 중도 해지권(break clause)을 넣는 방식이 흔하고, 임차인은 서비스 차지와 비즈니스 레이트(영업용 부동산에 부과되는 지방세)를 별도로 부담한다. 한국의 권리금처럼 점포의 '자리값'을 사고파는 관행은 제도적으로 정착하지 않았다. 다만 구체적인 계약 관행은 사빌스 보고서에 상세히 실려 있지 않아, 이 부분은 일반적 배경 설명으로만 이해해야 한다.

비어 있는 42%는 평균 5,500평방피트짜리 큰 점포였다

여기서 반전이 나온다. 재임대된 점포와 비어 있는 점포는 성격이 다르다. 42%에 이르는 미임대 재고는 영국 전역에서 약 50만 평방피트에 달한다. 그중 3분의 1가량은 새 임차인이 들어왔다가 다시 비게 된 이력이 있고, 3분의 2는 처음부터 계속 비어 있었다. 한 번 들어온 임차인이 곧 나갔다는 것은 그 입지의 질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신호다.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면적이다. 계속 비어 있는 점포의 평균 면적은 5,500평방피트로, 일반 소매 점포 평균보다 훨씬 크다. 큰 면적은 곧 높은 임대료, 높은 서비스 차지, 높은 비즈니스 레이트를 의미한다. 입지는 대체로 좋은 편인데도, 비용 구조가 재임대를 가로막는 것이다. 사빌스는 문을 닫은 백화점 옆에 붙어 있는 점포의 경우도 지적한다. 유동인구가 빠져나간 3차 입지(tertiary pitch)에는 새 임차인이 선뜻 들어오지 않는다.

영국 하이스트리트 전체는 오히려 공실이 줄고 있다

톱샵의 빈자리만 보면 상권이 무너진 것 같지만, 영국 전체 지표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2025년 1분기 쇼핑센터 공실률은 16.8%, 하이스트리트는 13.7%로, 두 자산 유형 사이에 유의미한 차이가 없었다. 같은 분기에 쇼핑센터는 0.4%포인트, 하이스트리트는 0.1%포인트 공실이 줄었다. 유동인구도 늘었다. 주간 평균 유동인구는 쇼핑센터가 1.8%, 하이스트리트가 1.3% 증가했다.

폐업도 예년보다 적었다. 영국 소매연구센터(Centre for Retail Research) 집계로 2025년 초부터 부도 영향을 받은 점포는 283곳으로, 지난 20년 연평균 약 2,900곳을 크게 밑돌았다. 다만 카펫라이트와 홈베이스처럼 부도를 맞은 업체들은 교외 리테일파크에 주력했고, 퀴즈가 23곳, 셀렉트 패션이 35곳을 닫은 사례처럼 하이스트리트 패션 업종의 구조조정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나 — 임대료, 금리, 그리고 4월의 세금

배경에는 거시경제가 있다. 2025년 5월 영국 중앙은행은 기준금리를 25bp(0.25%포인트) 내린 4.25%로 조정했다. 2024년 8월 정점 이후 네 번째 인하다. 2025년 3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2.6%로 둔화 추세를 이어갔고, 실질임금은 2024년 10~12월 사이 전년 대비 3.4% 올랐다. 소비 여력이 조금씩 회복된 것이다.

반대 방향의 압력도 컸다. 2024년 10월 예산안에서 최저임금 인상, 고용주 국민보험료 인상, 비즈니스 레이트 감면 축소가 예고됐고 4월부터 시행됐다. 점포 운영비를 끌어올리는 요인이다. 사빌스는 임대료 하락이 이 비용 부담에 대한 임차인의 반응이라고 해석한다. 동시에 4월 2일 발표된 미국의 관세 정책과 90일 유예 조치가 소비 심리를 흔들었다. 결국 임대료는 내려갔지만, 그 하락은 '상권이 죽었다'기보다 임차인이 새 비용 구조에 적응하는 과정의 조정으로 읽는 편이 맞다.

용도 전환 — 옷가게 자리에 피트니스와 뷰티가 들어왔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톱샵 자체의 귀환이다. 톱샵은 2021년 마지막 매장이 닫힌 뒤 4년 만인 2025년 5월 10일, 동런던 쇼디치의 하우스 음악 레이블 데펙티드 레코드 지하 공간에서 하루짜리 팝업을 열었다. 'Topshop & Topman In The House'라는 이름의 이 행사는 새 컬렉션 사전 판매와 한정판 티셔츠 판매를 겸했다. 사빌스는 이것이 여름철 오프라인 유통 파트너십을 통한 본격적인 하이스트리트 복귀의 전초전이라고 전했다. 아소스가 보유하던 지분 75%를 하트랜드와의 합작법인에 매각한 것이 배경에 있다.

한편 옛 점포에 들어온 새 임차인들은 의류 일색이 아니다. 사빌스가 든 사례로, 자라는 2021년 런던 원 뉴 체인지 쇼핑센터에 매장을 열며 앱 연동 매장 모드, 피팅룸 예약, 자동 픽업 거점을 도입했다. 2024년에는 리즈 트리니티의 옛 톱샵 자리에 새 플래그십을 냈다. 패션 브랜드가 대형 점포를 '체험형 매장'으로 재해석한 것이다. 반면 큰 면적을 감당하지 못하는 곳은 편의점, 식음료, 헬스앤뷰티, 서비스 업종으로 쪼개지며 채워지고 있다. 같은 거리에서도 점포의 용도가 패션에서 생활 서비스로 이동하는 것이다.

한국의 대형 패션 공백과 비교하면 — 2021년의 홈플러스, 그리고 동대문

한국에도 유사한 구조가 있다. 2021년 대형마트 의무휴업과 온라인 전환 속에서 홈플러스 매장 일부가 문을 닫았고, 서울 동대문의 패션 상권은 코로나 기간 유동인구가 급감하며 공실이 늘었다가 이후 도매·물류·쇼룸 등 다른 용도로 재편됐다. 공통점은 대형 점포의 공백이 단순 휴업이 아니라 임대 구조와 비용 부담의 재조정 과정이라는 점이다. 차이는 계약 제도다. 한국은 보증금과 갱신요구권이라는 안전장치가 있어 임차인이 장기간 버티는 반면, 영국은 장기 계약과 중도 해지권, 서비스 차지 부담이 임차인의 퇴거와 재계약을 더 빠르게 만든다.

그래서 영국의 재임대율 58%는 같은 숫자라도 의미가 다르다. 한국에서 58%는 '절반 이상이 그대로 살아남았다'로 읽힐 수 있지만, 영국에서는 '절반 가까이가 임차인을 두 번, 세 번 갈아치웠다'는 뜻일 수 있다. 임대차 계약이 짧은 주기로 갱신되는 시장에서는 점포의 생존보다 임차인의 교체가 빈번해진다.

이 보고서는 누구의 시각인가

사빌스 보고서는 상업용 부동산 중개·자문 회사의 리서치다. 임대인과 투자자에게 판매되는 자료이고, 보고서 말미에는 '사전 동의 없이 인용할 수 없다'는 저작권 고지가 붙어 있다. 따라서 '임대료가 곧 회복될 것'이라는 전망은 신중히 읽어야 한다. 실제로 보고서는 하이스트리트 투자에 대해 'income return이 매력적'이라며 매수를 권하는 논조를 취하고 있다. 톱샵 점포 분석 자체는 개별 점포를 추적한 드문 데이터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지만, 재임대율과 공실률의 해석은 자산 보유자 관점임을 감안해야 한다.

독자에게 — 빈 점포는 실패인가, 전환의 흔적인가

옥스퍼드 스트리트 214번지의 벽에는 아직 'TOPSHOP' 글자가 남아 있다. 그 브랜드는 팝업으로 돌아왔고, 그 자리에는 다른 이름의 가게가 들어올 준비를 하고 있다. 문제는 남은 42%다. 평균 5,500평방피트, 좋은 입지, 그러나 감당하기 어려운 비용. 이 점포들은 임대료를 더 낮춰서 채워야 할까, 아니면 아예 주거나 사무실, 문화 공간으로 용도를 바꿔야 할까. 여러분의 동네에도 비슷한 '큰 빈자리'가 있다면, 그 자리에 가게가 들어오는 것이 정말 답일까요.

참고 자료

Savills Research, Spotlight: Shopping Centre and High Street – Q1 2025, 2025년 5월 13일 (PDF: sc-and-hs-q1-2025.pdf).
이미지: Matt Brown, 'Topshop ghost sign 214 Oxford Street 2024-10-10', CC BY 2.0,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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