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COMMUNITY모든 이야기

피아노를 14시간씩 쳤는데, 정작 남긴 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 프란츠 리스트

빗방울 2026.10.31 21:15 10분 읽기 조회 23 · 추천 2

1832년 4월, 파리. 스무 살의 프란츠 리스트가 니콜로 파가니니의 연주를 듣습니다. 바이올린 하나로 사람을 울리고 웃기는 그 연주를 듣고 나서, 리스트는 결심합니다. 피아노로 파가니니가 되겠다고.

l1s.jpg

1858년의 프란츠 리스트. 무대에서 내려온 지 11년 뒤, 바이마르 시절의 모습입니다. —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하루 최대 14시간씩 연습했습니다. 1838년에는 그 결과를 파가니니 연습곡 여섯 곡으로 내놓았습니다. 바이올린의 기교를 건반 위에서 재현하겠다는 야심이었습니다.

1811년, 헝가리 국경의 작은 마을

리스트는 1811년 10월 22일, 당시 헝가리 왕국(합스부르크 제국)의 도보르얀에서 태어났습니다. 지금의 오스트리아 라이딩입니다. 즉 오늘날 국적으로는 오스트리아 땅이지만, 평생 자신을 헝가리인으로 여겼습니다.

l2s.jpg

바이마르 리스트 하우스에 걸린 초상. 1840년대 청년기의 얼굴입니다. —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아버지 아담 리스트는 에스테르하지 공의 영지 관리인이었고, 아마추어 음악가였습니다. 피아노·기타·플루트를 다뤘고, 하이든과 훔멜을 직접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리스트는 다섯 살이 되기 전부터 피아노 즉흥연주를 했습니다.

1830년대 파리, '피아노 결투'

파리에서 리스트는 지그문트 탈베르크와 경쟁 구도를 만들었습니다. 탈베르크는 당시 파리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피아니스트였습니다. 1836년 가을, 리스트는 그를 익명으로 비판하는 글을 냈고, 두 사람의 대결 구도가 신문을 채웠습니다.

이 사건은 음악사에서 '상아의 결투(The Ivory Duel)'로 불립니다. 재밌는 것은 결과가 누가 더 잘 쳤느냐로 정리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리스트가 연주회의 형식 자체를 바꿨기 때문에 승부가 무의미해졌습니다.

그 전까지 피아니스트는 프로그램의 일부였습니다. 여러 연주자가 번갈아 나오는 음악회에서 한 곡씩 맡는 방식이었습니다. 리스트는 혼자서 두 시간을 채우는 독주회(recital)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형식이 오늘날까지 이어집니다. 심지어 '리사이틀'이라는 단어를 그가 처음 썼다는 이야기도 전해집니다.

무대에서 내려온 서른다섯 살

1847년, 리스트는 우크라이나 키이우에서 카롤리네 추 자인-비트겐슈타인 공녀를 만납니다. 그리고 그해 9월, 러시아 엘리자베트그라드에서 인생 마지막 유료 연주회를 열었습니다. 나이 서른다섯.

이 결정이 흥미로운 이유는 전성기가 끝나기 전에 그만뒀기 때문입니다. 리스트는 이 시기에 전설적 명성의 정점에 있었습니다. 즉 그는 '더 이상 잘 칠 수 없을 때'가 아니라 '가장 잘 칠 때' 무대를 떠났습니다. 그래서 그의 연주 실력은 검증되지 않은 채로 전설이 될 수 있었습니다.

대신 그는 작곡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 선택이 음악사에서 더 중요합니다.

교향시 — 음악에 줄거리를 붙이다

리스트의 가장 큰 제도적 기여는 교향시(symphonic poem)입니다. 그는 13곡을 썼고, 그중 처음 12곡이 1848년에서 1858년 사이 작곡됐습니다. 대표작은 「전주곡」(Les préludes)과 「마제파」입니다.

교향시는 한 악장짜리 관현악곡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음악 외적인 이야기가 붙습니다. 시나 그림, 신화 같은 것이 '프로그램'으로 제공되고, 음악이 그것을 서술하거나 묘사합니다. 이것을 표제음악(program music)이라고 부릅니다.

왜 이게 혁신이었을까요. 고전주의 교향곡은 4악장이고, 악장마다 형식이 정해져 있습니다. 리스트는 형식을 이야기에 맞춰 늘이고 줄였습니다. 하나의 이야기를 따라가니까 악장을 나눌 이유가 없습니다. 즉 음악의 형식이 문학의 구조를 따르게 만든 것입니다.

이 시도는 당대 비평에서 혹평을 받았습니다. 특히 그가 살던 바이마르에서 비판이 심했습니다. 다만 후대에는 바그너와 20세기 음악으로 가는 길로 평가받습니다.

바이마르, 그리고 '삼중 생활'

1848년부터 리스트는 바이마르 궁정 악장으로 일했습니다. 이 시기 바이마르는 현대 음악의 거점이 됐습니다. 그런데 1857년 프란츠 폰 딩겔슈테트가 극장 감독으로 오면서 상황이 바뀝니다.

딩겔슈테트는 음악 공연 수를 줄이고, 리스트가 고른 레퍼토리를 거부했습니다. 심지어 1858년 리스트가 지휘한 오페라 초연에 반대 시위를 조직하기까지 했습니다. 리스트는 그해 사임했습니다.

이후 그의 삶은 로마·바이마르·부다페스트를 오가는 생활이 됩니다. 본인이 '삼중 생활(tripartite existence)'이라고 부른 형태입니다. 1869년부터는 바이마르에서 피아노 마스터클래스를 열었고, 정원사의 집(Hofgärtnerei)에서 17년간 가르쳤습니다.

'마스터클래스'라는 제도 자체를 리스트가 만들었다는 평가가 있습니다. 여러 제자가 한자리에서 서로의 연주를 듣고 토론하는 방식입니다. 오늘날 음악원의 수업 형태가 여기서 나왔습니다.

반전: 그는 자신의 음악을 팔지 않았다

리스트를 '기교의 사업가'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런데 기록은 다릅니다. 그는 연주 수입의 상당 부분을 기부했습니다.

1842년 함부르크 대화재 이후 이재민을 위한 연주회를 열었고, 쾰른 대성당과 페스트의 성 이슈트반 대성당 건축 기금에 큰 액수를 냈습니다. 병원·학교·라이프치히 음악가 연금기금 같은 곳에도 개인 기부를 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작곡가들을 위해 한 일입니다. 리스트는 베를리오즈·쇼팽·슈만·클라라 슈만·바그너의 친구이자 후원자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음악을 피아노용으로 편곡해 연주했습니다.

여기서 '편곡(transcription)'과 '파라프레이즈(paraphrase)'라는 용어를 음악에 처음 적용한 사람이 리스트입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쓰는 개념을 만든 것입니다. 그의 편곡은 상업적 상품이 아니라 보급 수단이었습니다. 교향곡을 들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피아노 한 대로 그 곡을 전달한 것입니다.

세상을 떠난 곳은 바이마르가 아니었다

리스트는 1886년 7월 31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나이 74세. 그가 죽은 곳은 바이로이트입니다. 손녀 코지마 바그너의 집이었고, 그해 바이로이트 축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러니가 하나 있습니다. 리스트는 바그너의 가장 강력한 후원자였고, 코지마는 리스트의 딸이자 바그너의 아내였습니다. 즉 그는 자기 딸의 집에서, 자기가 밀어준 작곡가의 축제가 열리는 동안 죽었습니다.

다만 관계가 늘 좋았던 것은 아닙니다. 리스트는 1860년 로마에서 교황 비오 9세를 만난 뒤 카롤리네와의 결혼을 추진했지만,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베(Abbé, 신부 호칭)로 불렸고, 말년에는 종교적 색채가 짙은 작품을 썼습니다.

그의 후기 작품이 진짜 반전이다

사람들이 아는 리스트는 「헝가리 광시곡」, 「안네 드 펠르리나주」, 「초절기교 연습곡」, 「라 캄파넬라」, 「나단조 피아노 소나타」 같은 화려한 곡입니다. 그런데 후기 작품은 전혀 다릅니다.

말년의 리스트는 조성을 흔들고, 화성을 쌓아 올리지 않고, 음악이 해결되지 않게 썼습니다. 이 실험들은 20세기 음악의 무조성을 미리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습니다. 즉 19세기의 쇼맨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실은 20세기의 문을 먼저 열어둔 셈입니다.

그래서 리스트는 무엇을 남겼나

세 가지로 정리됩니다.

1) 형식. 교향시, 리사이틀, 마스터클래스. 이 셋은 모두 오늘날 음악 생활의 기본 단위입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들이 그의 손에서 만들어졌습니다.

2) 전달. 편곡과 파라프레이즈라는 개념. 그리고 다른 작곡가의 음악을 퍼뜨리는 일을 예술로 만든 것. 그가 없었다면 바그너와 베를리오즈는 훨씬 늦게 알려졌을 것입니다.

3) 시간. 하루 14시간의 연습. 그리고 전성기에 무대를 떠난 결단. 그는 더 잘 치기 위해 그만둔 것이 아니라, 더 오래 남기 위해 그만뒀습니다. 피아노를 14시간씩 쳤지만, 정작 오래 남은 것은 소리가 아니라 구조였습니다.

여러분에게

리스트의 곡 중 하나만 들어보신다면, 「라 캄파넬라」보다 나단조 피아노 소나타를 권합니다. 30분이 넘는 한 악장짜리 곡인데, 그 안에 주제 하나가 계속 변신합니다. 이걸 주제 변형(thematic transformation)이라고 부르고, 역시 리스트가 체계화한 기법입니다.

혹시 리스트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 사람은 왜 이렇게까지 쳤을까' 생각해보신 적 있나요. 저는 그 답이 파가니니를 들은 스무 살의 밤에 있다고 봅니다. 하루 14시간은 재능이 아니라 결심의 흔적입니다.

참고 자료

  • 프란츠 리스트 (1811.10.22 도보르얀 ~ 1886.7.31 바이로이트) — 작곡가·피아니스트·지휘자·교육자
  • 1832년 파가니니 연주를 듣고 결심, 하루 최대 14시간 연습, 1838년 파가니니 연습곡 발표
  • 1836년 탈베르크와의 경쟁('상아의 결투') — 독주회(recital) 형식의 형성
  • 1847년 9월 엘리자베트그라드에서 마지막 유료 연주회, 당시 35세
  • 교향시 13곡 — 처음 12곡이 1848~1858년 작곡, 대표작 「전주곡」·「마제파」
  • 1857년 딩겔슈테트 부임 후 레퍼토리 거부·시위 조직, 1858년 사임
  • 1869년부터 바이마르 Hofgärtnerei에서 17년간 마스터클래스
  • 편곡(transcription)·파라프레이즈(paraphrase) 용어를 음악에 처음 적용
  • 주요작: 헝가리 광시곡, 안네 드 펠르리나주, 초절기교 연습곡, 라 캄파넬라, 나단조 피아노 소나타
  • 본 글은 공개된 전기·음악사 기록을 정리한 것이며, 특정 연주나 평가를 단정하지 않습니다.

모든 이야기1488

가벼운 안부부터 깊은 생각까지, 함께 나눠요.

글쓰기
총 1488개의 이야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