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영국 도시정책 싱크탱크 Centre for Cities가 「Follow the money: explaining the performance of London’s suburban high streets」라는 보고서를 냈다. 결론은 뜻밖이다. 런던의 하이스트리트(high street·영국의 동네 중심 상가거리)는 영국에서 상가 공실률이 가장 낮다. 그런데도 런던 안에는 빈 점포가 유난히 많은 거리가 몇 곳 있다. 보고서는 그 소수만 확대경으로 들여다본다. 이스트런던 일포드(Ilford), 웨스트런던 셰퍼즈부시(Shepherd’s Bush), 남런던 크로이던(Croydon)이다.
세 거리, 세 개의 숫자
일포드 하이스트리트의 공실률은 16~18%다. 보고서는 이 지역이 런던 교외의 대형(primary) 하이스트리트 평균보다 빈 점포가 거의 두 배이며, 영국 도심 평균 공실률 13%를 넘는 몇 안 되는 런던 거리 중 하나라고 적는다. 셰퍼즈부시는 14~16%다. 크로이던은 18~20%로, 보고서가 “영국에서 가장 성적이 나쁜 도심”이라고 부른 뉴포트(Newport)와 같은 수준이다.
같은 도시, 같은 나라, 같은 시기인데 왜 이 세 곳만 다를까. 보고서의 답은 하나로 묶이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똑같아 보이는 빈 점포가 실은 서로 다른 병의 증상이라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일포드: 돈이 없는 것이 문제다
일포드의 경우는 원인이 단순하다. 보고서는 런던 전역에서 상권 부진을 가장 잘 설명하는 변수로 “불충분한 수요”, 그중에서도 낮은 소득을 꼽는다. 일포드 상권의 배후지(catchment·점포가 손님을 끌어오는 범위)에 사는 주민 한 명은 런던 평균 주민보다 하이스트리트에서 쓸 돈이 연간 5,000파운드 적다. 가게가 아무리 잘 꾸며도 지갑이 얇으면 매출이 서지 않는다.
배후지 크기가 작고 방문객이 적은 것도 겹친다. 다시 말해 일포드의 문제는 가게를 둘러싼 물리적 환경이 아니라 그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소득이다. 이 경우 점포 수를 줄이는 처방은 효과가 제한적이다.
일포드 하이 로드(Ilford High Road)의 보행자 거리. 보고서는 이 거리의 공실률을 16~18%로 집계했다 — Sunil060902,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셰퍼즈부시: 쇼핑몰에 절반을 내준 거리
셰퍼즈부시는 정반대처럼 보인다. 런던 교외에서 가장 큰 배후지를 가졌고, 배후지 평균 소득은 런던 평균에 매우 가깝다. 방문객도 많다. 유동인구 비중이 런던 전체 평균의 두 배다. 그런데도 공실률은 평균을 웃도는 14~16%다.
이유는 그 거리 안에 웨스트필드(Westfield) 쇼핑센터가 있기 때문이다. 보고서는 하이스트리트의 절반, 즉 쇼핑센터가 들어선 쪽은 매우 잘 돌아가지만 나머지 절반, 특히 옛 시장 주변은 경쟁에서 밀리고 있다고 설명한다. 2022년부터 2024년 사이 셰퍼즈부시 하이스트리트에서 쓰인 4파운드 중 3파운드가 웨스트필드에서 지출됐다. 일부는 외부에서 새로 들어온 돈이지만, 상당 부분은 원래 거리 가게로 갔어야 할 돈이 빼앗긴 것이다.
배후지가 크고 소득도 괜찮은데 가게가 비는 이유는, 공급이 수요보다 많은 구간이 생겼기 때문이다. 쇼핑센터 하나가 사실상 도심 전체의 상권 기능을 흡수하면서 나머지 점포의 몫이 줄어든 구조다.
크로이던: 1970년대가 남긴 과잉
크로이던도 비슷한 쪽이다. 센트럴 크로이던은 런던 교외 하이스트리트 중 네 번째로 큰 배후지를 갖고 있고, 주민 소득도 런던 평균과 거의 같으며, 유동인구도 런던 평균에 가깝다. 그런데 공실률은 18~20%다.
원인은 수요가 아니라 공급이다. 크로이던 하이스트리트는 배후지 주민 100명당 상가 면적이 27제곱미터로, 런던 전체 평균의 거의 두 배다. 보고서는 이 과잉의 상당 부분이 1970~90년대 계획정책의 유산이라고 본다. 당시 정책은 교외형 대형 쇼핑몰에 맞서려고 시내 상업면적을 대대적으로 늘리도록 유도했고, 그 결과 휘트기프트 센터(Whitgift Centre) 같은 시설이 만들어지고 확장됐다. 이 센터는 소비 수요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지금은 대부분 비어 있다.
영국 상가 임대 제도 — 확인되지 않은 부분부터
이 보고서는 임대료·권리금·보증금 같은 임대차 계약 구조를 다루지 않는다. 따라서 이 세 거리의 공실이 임대 조건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원문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한국 독자에게 낯선 배경은 짚어둘 만하다.
영국 상가는 크게 두 가지 보유 방식으로 나뉜다. 하나는 프리홀드(freehold·토지와 건물의 소유권을 영구히 갖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리스홀드(leasehold·99년, 125년처럼 긴 기간의 임차권을 사서 갖는 방식)다. 리스홀드는 한국의 전세나 월세와 달리 “오래 산 임차권”을 자산처럼 거래한다는 점이 다르다. 점포 하나를 사고파는 계약에서 이 리스홀드 권리가 함께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한국의 권리금, 즉 장사가 잘 되는 자리의 영업권을 따로 돈 받고 넘기는 관행은 영국에서 일반적이지 않다. 대신 상업용 임대차는 보통 상가임대차보호법 같은 일률적 보호 체계보다 계약 자유에 맡겨지고, 임차인 보호는 계약서의 보증금(deposit)과 임대 기간 조항에 의존한다. 이 대목은 일반적 배경 설명이며, 이번 보고서의 근거는 아니다.
수요와 공급을 맞추는 두 가지 처방
보고서는 공실을 “상권 공간의 수요와 공급이 어긋났을 때 생기는 증상”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수요는 배후지 소득, 배후지 규모, 방문객 세 가지로 결정된다고 본다.
셰퍼즈부시와 크로이던은 수요가 낮지 않다. 공급이 넘친다. 그래서 여기서는 공급을 줄이는 개입, 즉 잉여 상가 공간을 걷어내는 정책이 필요할 수 있다. 실제로 크로이던 의회는 휘트기프트 센터의 일부를 소매에서 주거와 녹지로 전환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일포드는 반대로 수요를 키워야 하는 쪽이다. 보고서는 도심 성장을 통한 임금 상승, 주택 공급 확대를 통한 주거비 부담 완화, 관광객 세금을 거리 청소·공공공간 개선·관광 마케팅에 재투자하는 방안을 제시한다.
반전 — 이건 상권의 몰락이 아니라 용도의 재편이다
이 보고서를 “런던 상권도 망가졌다”로 읽으면 핵심을 놓친다. 런던 전체 하이스트리트의 공실률은 영국 도시 중 가장 낮다. 문제는 특정 거리의 점포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한 거리 안에서 상업 기능이 한쪽으로 몰리고 다른 쪽이 다른 용도로 바뀌는 과정이다.
크로이던의 휘트기프트 센터가 주거와 녹지로 전환되는 계획이 대표적이다. 셰퍼즈부시의 옛 시장 쪽이 쇠퇴하는 동안 같은 거리의 쇼핑센터 쪽은 번성한다. 가게가 없어지는 게 아니라 “가게가 있어야 할 자리”가 다시 계산되는 것이다. 보고서도 정책의 목표를 빈 점포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수요와 공급의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규정한다.
크로이던 하이스트리트. 보고서는 이 거리의 공실률을 18~20%, 배후지 주민 100명당 상가면적을 27제곱미터로 집계했다 — Michael Garlick, CC BY-SA 2.0 (Wikimedia Commons)
한국과 비교하면 — 신촌과 성수 사이
한국에는 이 보고서의 세 가지 유형이 모두 있다. 배후지 소득이 낮아 수요가 약한 곳은 지방 중소도시의 원도심 상권이 대표적이고, 대형 쇼핑몰이 옛 상권의 매출을 흡수하는 구조는 신도시 백화점·복합몰 인근 구도심에서 반복된다. 반면 서울 성수처럼 공간이 부족해 임대료가 치솟는 상권은 정반대의 문제를 겪는다.
같은 점은 한국도 “상권이 죽었다/살았다”보다 “어떤 용도로 다시 채울 것인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른 점은 제도다. 한국은 권리금과 보증금, 상가임대차보호법으로 임차인의 영업 기대를 제도적으로 보호하지만, 영국은 리스홀드라는 장기 임차권과 계약 자유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그 결과 한국에서는 점포 하나가 비었을 때 임차인의 손실과 권리금 분쟁이 먼저 문제 되고, 영국에서는 건물 자체의 용도 전환이 정책 과제로 먼저 떠오른다. 같은 공실을 다루는 언어가 다르다.
사료의 한계 — 누구의 시선인가
이 글은 Centre for Cities의 블로그이며, 근거는 같은 기관의 보고서다. Centre for Cities는 영국 도시경제를 다루는 독립 싱크탱크로, 상권의 성과를 수요·공급이라는 경제학적 틀로 설명하는 시각을 갖는다. 따라서 이 글이 상인의 영업 손익, 임대인의 수익 구조, 종사자 관점의 고용 변화는 상대적으로 적게 다룬다. 공실률과 배후지 소득은 계량 가능하지만, 거리에서 장사하는 사람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 보고서 자체도 일부 인용은 지역 언론 보도에 의존한다.
독자에게
우리 동네 상권이 비고 있다면, 그 원인은 수요일까 공급일까. 가게를 줄이는 처방이 통하는 거리인지, 사람들의 지갑을 두껍게 만드는 처방이 필요한 거리인지 — 한 번쯤 바꿔 물어볼 만하지 않을까요.
참고 자료
- Centre for Cities, “Exceptions to the rule: why some London high streets are struggling”, 2025년 12월 16일 — 원문 링크
- Centre for Cities, “Follow the money: explaining the performance of London’s suburban high streets”, 2025년 12월 — 보고서 PDF
- 이미지: Ilford High Road — Sunil060902, CC BY-SA 3.0 / Croydon High Street — Michael Garlick, CC BY-SA 2.0 (Wikimedia Commons)
댓글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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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1.02 01:25
크로이던 숫자 보고 든 생각은, 100명당 27제곱미터라는 과잉이 결국 1970년대 정책 실수의 빚이라는 점이야. 지금 상가를 줄이자는 처방도 30년 뒤엔 또 다른 과잉이 될 수 있으니, 지금 결정이 다음 세대한테도 납득될지 먼저 따져봐야 할 것 같음. 셰퍼즈부시처럼 쇼핑센터가 거리 절반을 먹어버리는 그림 말고, 거리 전체 재무제표로 계산했으면 좋겠어. -
빗방울
2026.11.02 06:30
1970년대에 늘린 상가 면적이 50년 뒤 빈 점포로 돌아오는 걸 보면, 지금 짓는 대형 몰도 언젠가 같은 청구서를 내겠네요. -
빗방울
2026.11.02 08:47
일포드랑 셰퍼즈부시는 처방이 정반대라는 것도 재밌는데, 거리 청소나 공공공간 개선에 돈을 돌리자는 건 결국 돈 적은 동네가 가게 걷어내는 대신 장소를 살리라는 얘기잖아 😅 그게 실제로 소득 문제를 메울 수 있을지 궁금하네 👍 -
빗방울
2026.11.02 10:21
한국 쪽 비교에서 권리금 얘기가 나오니까 궁금해지네요. 영국은 리스홀드가 자산처럼 거래돼서 건물 용도 전환 결정이 비교적 빠른 편인가요, 아니면 임차권자가 버티면 그것도 쉽지 않은가요? 그리고 휘트기프트 센터를 주거로 바꾸면 그 자리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은 어디로 가게 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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