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COMMUNITY모든 이야기

가구점 절반이 사라진 영국 리테일 파크 — 할인 식료품이 그 자리를 채운 이유

빗방울 2026.11.04 03:25 8분 읽기 조회 30 · 추천 2

영국 유통 부동산의 '리테일 파크(retail park)'는 도심 밖 간선도로변에 대형 주차장을 깔고 창고형 매장 몇 동을 나란히 세운 상업 공간이다. 2012년 무렵 이 공간의 절반 가까이는 가구·전자제품·철물처럼 부피가 크고 값이 나가는 '벌키 굿즈(bulky goods)' 매장이 차지했다. 상업용 부동산 자문사 Savills가 2026년 10월 29일 공개한 보고서 「Value retail finds footing out-of-town」은 바로 이 구성표가 뒤집혔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같은 영국 리테일 웨어하우징 시장에서 이들 품목이 차지하는 면적 비중은 2025년 31%까지 내려왔다. 사라진 19%포인트 남짓의 자리는 할인 식료품점과 할인 잡화점이 채웠다.

이 글은 "상권이 망했다"는 서사가 아니라, 소비자의 지갑이 닫히면서 같은 건물 안의 임차인 명단이 통째로 바뀌는 과정을 다룬다. 한국의 대형마트·아울렛과 닮은 지점도 있지만, 임대차 구조와 규제 환경이 달라서 변화의 방향은 조금 다르게 나타난다.

절약이 습관이 되자, 큰 지출부터 사라졌다

Savills가 지목한 첫 번째 동력은 저축이다. 2020년 이후 유로존 가계의 평균 저축률은 15.4%로, 이전 10년 평균 12.4%를 웃돈다. 코로나19를 거치며 '일단 모아둔다'가 기본값이 된 셈이다. 두 번째는 심리다. EU 소비자 신뢰 지표 가운데 '지금이 큰 지출을 하기에 적절한 시기인가'를 묻는 항목은 팬데믹 이전만 해도 전체 신뢰 지표와 5포인트 이상 벌어진 적이 드물었다. 그런데 2023년에는 이 격차가 최대 23포인트까지 벌어졌다. 살 것이 있으면 사는 게 아니라, 살 만한 것만 골라 산다는 뜻이다.

보고서는 이 흐름을 "구매는 점점 가치와 필요성이라는 렌즈로 판정된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인플레이션과 지정학적 충격이 여러 차례 겹치면서 절약이 일시적 유행이 아니라 습관으로 굳었다는 진단이다. 가구를 사려고 리테일 파크를 찾던 사람은 줄고, 생활용품과 식료품을 싸게 사러 오는 사람이 늘었다.

영국의 상가 임대 구조 — '장기 임대차'가 만드는 관성

이 변화를 읽으려면 영국 상업용 부동산의 소유·임대 관행을 먼저 알아야 한다. 영국에서는 건물이 딸린 토지를 영구 소유하는 '프리홀드(freehold, 자유보유권)'와, 토지 소유자에게 장기 임차료를 내고 건물을 쓰는 '리스홀드(leasehold, 차지권)'가 나란히 쓰인다. 상업용 리테일에서는 임차인이 상가를 직접 소유하는 경우가 드물고, 대개 10~15년 이상의 장기 임대차 계약을 맺는다. 계약에는 임대료를 일정 주기로 올리는 '업워드 온리(upward only)' 조항이 붙는 경우가 많았다. 한국처럼 목돈 보증금을 맡기고 2년 단위로 갱신하며 권리금을 주고받는 구조와는 계약의 무게감이 다르다. 임차인 입장에서는 "매출이 줄어도 계약서에 적힌 임대료는 계속 나간다"는 부담이 생긴다.

다만 Savills의 이번 글에는 리스홀드·프리홀드나 임대료 조정 조항에 대한 구체적 수치가 나오지 않는다. 위 설명은 영국 상업 임대차의 일반적 배경이며, 해당 기사가 직접 확인한 내용은 아니다. 업종 구성 변화와 임대 구조를 인과로 단정하지 않는 것이 안전하다.

임차인 명단이 바뀌었다 — 할인 식료품과 잡화의 진입

보고서가 든 숫자는 명확하다. 영국 리테일 웨어하우징 시장에서 벌키 굿즈·홈웨어·전자제품이 차지하는 면적 비중은 2012년 거의 절반에서 2025년 31%로 줄었다. 빈자리는 식료품, 특히 할인 식료품과 할인 잡화 운영자가 가져갔다. 이들은 넓은 매장과 주차장이 필요한 창고형 점포 모델을 그대로 쓰면서도 객단가를 낮춰 방문 빈도를 높인다. 같은 건물, 같은 주차장인데 매장 안의 물건과 가격대가 달라진 것이다.

유럽 전역이 똑같지는 않지만, 여러 시장이 '가치 중심·필수 소비재 비중 확대'라는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고 보고서는 적는다. 경기 침체기에도 사람이 끊기지 않는 구성을 갖추게 됐다는 평가다.

왜 지금인가 — 임대료·이커머스·인구보다 '지갑의 심리'

한국 상권 분석에서 단골로 등장하는 요인은 임대료 급등, 이커머스 잠식, 인구 감소, 재택근무다. 이 기사가 강조하는 축은 조금 다르다. 유로존 가계 저축률과 소비 심리, 그리고 대형 지출을 미루는 행동 패턴이다. 물론 리테일 파크의 넓은 면적과 주차 편의성은 이커머스 시대에도 반품·픽업·체험 수요를 흡수하는 자산이었다. 그러나 이번 글은 그런 구조적 요인보다 소비자의 '가치 판단' 변화를 전면에 세운다. 임대료 수치나 공실률, 유동인구 같은 정량 지표는 제시되지 않는다.

반전 — 이것은 몰락이 아니라 용도 전환이다

표면만 보면 "리테일 파크에서 가구점이 사라졌다"는 쇠퇴 서사다. 그러나 보고서의 해석은 반대에 가깝다. 벌키 굿즈는 여전히 리테일 파크의 중심 업종이지만, 더 이상 '지배적'이지는 않다. 할인 식료품과 잡화가 들어오면서 공간은 오히려 경기 변동에 덜 흔들리는 구성이 됐다. 소비자가 큰 지출을 미루는 동안에도 매일 사는 물건은 사야 하기 때문이다. 즉 이 변화는 상권의 축소가 아니라, 같은 부동산이 더 방어적인 소비 수요에 맞춰 재편된 사례다. 임대인이 임차인을 바꾸고, 임차인이 상품 구성을 바꾸는 방식으로 공간이 살아남은 것이다.

rp_small.jpg

브라이턴힐 리테일 파크(Brighton Hill Retail Park, 잉글랜드 베이싱스토크)의 매장 동 — Fernweh, CC BY-SA 2.0 (Geograph Britain and Ireland, via Wikimedia Commons)

한국과 견주면 — 대형마트 규제와 '의무휴업'이라는 변수

한국에서 비슷한 처지의 상권은 도심 외곽의 대형마트·복합쇼핑몰이다. 2010년대 이후 유통산업발전법에 따른 의무휴업일과 영업시간 제한, 대규모 점포 등록 규제가 겹치면서 이들 공간은 식료품보다 임대 수익이 높은 문화·체험·식음 시설로 면적을 재편해 왔다. 영국 리테일 파크가 할인 식료품으로 중심을 옮긴 것과 달리, 한국은 규제 때문에 오히려 필수 소비재 매장을 줄이고 체험형 임차인을 늘리는 방향으로 갔다. 같은 '용도 전환'이지만 규제 환경이 방향을 갈랐다는 점이 다르다. 물론 한국의 구체적 수치를 이 기사에 기대어 말할 수는 없으므로, 비교는 구조적 유사성 수준에 머문다.

사료의 한계 — 누구의 시선인가

이 글은 Savills 유럽 리서치팀 애널리스트가 쓴 상업용 부동산 중개·자문사 리포트다. 리테일 파크의 임대 성과와 투자 매력을 설명하는 것이 1차 목적이므로, 업종 전환을 '회복'과 '방어력'의 언어로 서술하는 경향이 있다. 개별 상인의 폐업이나 지역 고용 같은 비용은 다뤄지지 않는다. 또 인용된 수치는 유럽 전체 또는 영국의 리테일 웨어하우징 시장 단위이며, 특정 도시의 한 거리를 가리키는 사례가 아니다. 도시 단위의 장면을 기대했다면 이 글은 그 기대에 답하지 않는다.

독자에게 — 우리 동네 대형 점포는 무엇을 팔고 있나

동네 외곽 대형마트나 아울렛에 마지막으로 간 게 언제인가. 그곳에서 산 것이 '가끔 쓰는 큰 물건'이었는지, '매주 사는 생활용품'이었는지 떠올려 보자. 영국의 리테일 파크는 후자 쪽으로 무게를 옮겨 살아남았다. 한국의 대형 점포는 어느 쪽으로 옮겨가고 있는가. 그리고 그 이동은 소비자의 선택인가, 규제와 임대료가 만든 결과인가.

참고 자료

  • Chris Nichols, 「Value retail finds footing out-of-town」, Savills(유럽 리테일 웨어하우징 2026), 2026년 10월 29일. https://www.savills.co.uk/research_articles/229130/395918-0

모든 이야기1717

가벼운 안부부터 깊은 생각까지, 함께 나눠요.

글쓰기
총 1717개의 이야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