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웨일스 남부의 항구도시 뉴포트(Newport, 인구 약 15만 명) 도심에서 브리지 스트리트와 하이 스트리트가 만나는 교차로에 서면, 19세기 은행 건물과 붉은 벽돌 상가가 늘어선 골목 한가운데가 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한 블록만 걸어 들어가면 셔터가 내려진 점포가 드문드문 보인다. 영국 도시정책 싱크탱크 센터 포 시티즈(Centre for Cities)가 2025년 7월 내놓은 연구에 따르면, 이 도시가 속한 그룹의 점포 공실률은 16%를 넘었다. 같은 시기 런던 도심은 7.4%였다. 같은 7월, 이 연구는 "영국 도심을 되살리려면 최대 50억 파운드(약 9조 원 안팎)가 필요하다"는 결론으로 가디언에 보도됐다.
두 배로 벌어진 두 개의 거리
보도에 따르면 브래드퍼드(잉글랜드 요크셔), 뉴포트(웨일스 남부), 블랙풀(랭커셔) 같은 지역은 런던의 두 배에 이르는 비율의 점포가 비어 있다. 반대로 요크·런던·에든버러에서는 점포 공실률이 9%를 조금 넘는 수준이고, 런던은 7.4%다. 브래드퍼드·스토크·위건은 공실률이 16%를 넘는다.
더 흥미로운 숫자는 지출 구성이다. 부유한 요크·런던·에든버러에서는 4파운드 중 1파운드가 외식과 음주에 쓰인다. 반면 공실률이 가장 높은 브래드퍼드·스토크·위건에서는 10파운드 중 1파운드 수준이다. 가게가 비는 것과 거리에서 돈이 도는 방식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뜻이다.
영국의 상가 임대 구조: 프리홀드·리스홀드와 사업세
한국 독자에게 낯선 배경부터 짚어야 한다. 영국 상가의 소유권은 크게 두 갈래다. 건물과 땅을 사실상 영구히 갖는 프리홀드(freehold), 그리고 99년·125년·999년 같은 정해진 기간의 사용권만 사는 리스홀드(leasehold)다. 한국의 전세가 보증금을 맡기고 2년 뒤 돌려받는 구조라면, 영국의 상업용 리스홀드는 계약 기간 자체를 사는 구조에 가깝다.
또 하나의 축은 사업세(business rates)다. 건물 임차인이 임대료와 별도로 내는 재산 기반 세금으로, 영국에서는 오랫동안 "낡은 제도"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다만 이번 기사의 원문에는 프리홀드·리스홀드의 세부 조건이나 보증금 관행, 권리금에 해당하는 제도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 않다. 위 배경 설명은 일반적 제도 소개이며, 이번 연구가 다룬 범위는 아니다(기사 원문에서 확인되지 않음).
"세금을 고쳐도 안 된다"는 보고서의 반전
소매업계는 오랫동안 사업세 인하, 고용세 부담 완화, 주차 요금 인하를 요구해 왔다. 그런데 보고서는 "결함 있는" 사업세 제도를 고치는 것만으로는 어려운 지역의 하이스트리트를 되살릴 수 없다고 못 박는다. 이미 많은 부동산이 세금을 내지 않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보고서의 논리는 이렇게 요약된다. "어려움을 겪는 하이스트리트는 어려움을 겪는 지역 경제의 결과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 센터 포 시티즈 대표 앤드루 카터는 "하이스트리트가 모든 곳에서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실패하는 곳의 원인은 겉모습이 아니라 경제다. 상점 외관이나 임대료, 주차에 관한 정책은 더 큰 그림을 놓치고 있다"고 말했다. "어려움을 겪는 도심은 가게가 과잉 공급되고 사람이 과소 공급된 상태"라는 표현이 보고서의 핵심을 압축한다.
용도 전환인가, 몰락인가
여기서 통념을 한 번 뒤집을 필요가 있다. 영국 상권 담론은 십수 년째 "하이스트리트의 죽음"이라는 틀에 갇혀 있지만, 이 연구가 실제로 말하는 것은 몰락이 아니라 이동이다. 부유한 지역에서는 온라인으로 옮겨간 소매 기능의 빈자리를 식음료와 여가가 채웠다. 가게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같은 건물 안에서 파는 물건이 옷에서 커피로 바뀐 것이다.
이 전환이 일어나지 않은 곳은 사람 자체가 부족한 곳이다. 도심에 사는 인구가 적고, 그마저 가처분소득이 낮으면 외식과 여가로 옮겨갈 여력이 없다. 그래서 보고서는 가게 외관 단장이나 임대료 보조가 아니라 도심 주택 공급과 고임금 일자리를 처방으로 내놓는다. 문제는 이 처방이 몇 년 안에 성과를 내기 어렵다는 점이다. 50억 파운드라는 숫자도 결국 "거리"가 아니라 "사람"에 쓰라는 요구다.
관광과 통근이라는 두 가지 예외
보고서는 두 가지 예외적 사례도 짚는다. 요크는 인구 대비 점포 수가 많은데도 공실률이 낮다. 관광 수요가 이를 떠받치기 때문인데, 모든 도시가 관광지를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이 보고서의 단서다. 다른 예외는 반대 방향이다. 스윈던과 슬라우 주변은 지역 경제 자체는 강하지만, 소비자들이 도심 밖 비즈니스 파크에서 주로 일하기 때문에 상점이 어려움을 겪는다. 경제가 좋은데도 거리가 비는 도시가 있다는 뜻이다.
한국의 동성로·부산대 앞과 겹치는 지점
한국에서 가장 비슷한 처지는 대구 동성로나 부산대 앞이다. 임대료가 내려가도 공실이 채워지지 않고, 상권의 문제가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배후 인구와 소비력의 문제로 번지는 양상이 영국 중소도시의 그것과 닮았다. 다른 점은 두 가지다. 한국은 권리금과 전세·보증금 구조가 임차인의 진입 비용을 크게 만들고, 재개발·재건축이라는 별도의 물리적 변수도 상권을 통째로 휩쓴다. 영국 보고서의 "사람을 먼저 데려오라"는 처방을 한국에 그대로 옮기려면, 임대차 비용 구조와 공급 규제를 함께 봐야 한다.
이 기사를 누구의 시각으로 읽어야 하나
이 보도는 싱크탱크의 연구를 소개하고, 이어 소매업계 단체인 영국소매협회(BRC)의 요구를 함께 싣는다. BRC는 도심에 쇼핑과 환대(hospitality)가 섞인 복합 용도가 필요하다면서도 결국 "낡은 사업세 제도가 투자를 막는다"는 논지를 반복한다. 즉 기사 안에는 거리의 문제를 사람과 일자리로 보는 연구진과 세금 감면을 원하는 업계의 두 목소리가 나란히 놓여 있다. 보고서가 제시한 50억 파운드가 어떻게 산정된 것인지, 누가 부담해야 하는지는 이 기사만으로는 알 수 없다.
독자에게
만약 우리 동네 상권이 "장사가 안 되는 거리"가 아니라 "사람이 돌아오지 않는 거리"라면, 우리가 지금 쓰는 돈은 간판을 바꾸는 데 쓰이고 있는 걸까, 아니면 사람을 불러들이는 데 쓰이고 있는 걸까. 그리고 그 50억 파운드의 청구서는 결국 누가 내야 하는 것일까.
웨일스 뉴포트의 브리지 스트리트와 하이 스트리트 교차로(2019년 7월). 오른쪽 아래에 임대 표지가 붙은 빈 점포가 보인다 — Llemiles,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참고 자료
· "As much as £5bn needed to revive UK’s struggling high streets, study finds", The Guardian, 2025년 7월 10일(발행 표기 2025년 7월 9일). theguardian.com
· 연구: Centre for Cities(영국 도시정책 싱크탱크) 보고서, 2025년 7월. 본문의 수치는 위 가디언 기사에 인용된 값만 사용했다.
댓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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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1.05 07:32
영국 얘기 읽다가 대구 동성로가 자꾸 떠오르네요. 임대료 낮춰도 안 채워지는 거리는 결국 배후 인구 문제인데, 그 배후 인구를 다시 불러오는 데도 돈이 들까요? 그리고 50억 파운드처럼 숫자를 먼저 정해 놓고 시작하는 방식이 실제로 효과가 있었던 사례는 어디쯤 있을까요? 스윈던처럼 경제는 좋은데 도심만 비는 경우는 우리나라로 치면 어디가 제일 비슷할까요? -
빗방울
2026.11.05 09:00
스윈던·슬라우처럼 경제는 좋은데 도심이 비는 경우가 제일 곤란하다. 주거 공급만 늘린다고 그게 메워지진 않을 것 같다.
모든 이야기1907
가벼운 안부부터 깊은 생각까지, 함께 나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