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터 잉크 카트리지를 바꾸려고 뚜껑을 열면 늘 네 개의 작은 통이 나란히 서 있다. 시안, 마젠타, 옐로, 그리고 검정. 정작 학교에서 색을 배울 때 칠판에 그려지는 삼각형은 빨강, 초록, 파랑이다. 물리 교사는 학생들에게 미술 시간에 배운 것을 잠시 잊으라고 말한다. 빛은 더해서 색이 되고, 잉크는 빼서 색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작 손에 들린 카트리지는 왜 미술 시간 쪽에 가까운 걸까. 데이비드 마라스코가 2026년 11월 2일 arXiv에 올린 논문 「Getting the picture - Subtractive color mixing with an inkjet printer」는 바로 이 어색한 틈에서 시작한다.
빛의 삼원색은 가르치고, 잉크의 삼원색은 가르치지 않는다
논문은 먼저 교육 현장의 불균형을 지적한다. 가산 혼합, 즉 빛을 더해 색을 만드는 방식은 LED와 컬러 모니터 덕분에 시연하기가 매우 쉽다. 세 개의 다이오드에 걸리는 전류만 조절하면 실시간으로 색이 변하고, 학생들은 눈앞에서 흰색이 만들어지는 것을 본다. 반면 감산 혼합의 삼원색인 시안·마젠타·옐로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왔다. 논문은 학생들이 이 세 색을 접하는 유일한 통로가 대개 프린터 잉크 카트리지뿐이라고 짚는다.
왜 이런 공백이 생겼을까. 저자는 그 이유를 솔직하게 밝힌다. 안료는 빛처럼 밝기를 실시간으로 바꾸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모니터의 빨강을 어둡게 만들려면 슬라이더를 내리면 되지만, 이미 칠해진 마젠타 잉크를 옅게 만드는 방법은 없다. 물리 교실에서 감산 혼합이 사라진 것은 개념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시연 도구가 마땅치 않아서였다는 이야기다. 논문은 이 지점에서 미술과 교차한다. 미술과 동료들은 수십 년째 컬러 인쇄라는 렌즈를 통해 감산 혼합을 가르쳐 왔고, 저자는 그들의 책에서 한 장을 빌려온다고 말한다.
시안과 마젠타를 겹치면 왜 검정이 아니라 탁한 색이 되는가
이론적으로는 시안, 마젠타, 옐로 세 잉크를 모두 겹치면 모든 파장이 흡수되어 검정이 되어야 한다.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논문은 이 어긋남을 CMYK에서 K가 추가된 이유로 설명한다. 안료는 이상적이지 않아서, 세 색을 겹쳐도 순수한 검정이 아니라 탁하고 muddy한 색이 나온다. 그래서 인쇄는 검정을 네 번째 층으로 따로 둔다. 여기서 반직관적인 결론이 나온다. 검정은 색이 아니라 색의 실패를 덮는 층이라는 것이다.
시안·마젠타·옐로·검정 네 채널로 분해된 같은 사진 — 각 채널은 흡수할 파장만 남기고 나머지를 비운다. Magica,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이 대목은 물리 수업에서 쓰기 좋은 반전이다. 교과서의 감산 혼합 도식은 안료가 이상적이라고 가정하지만, 실제 프린터는 그 가정이 무너지는 현장을 매일 보여준다. 학생들이 카트리지 네 개 중 왜 하나가 유독 빨리 닳는지 궁금해했다면, 그 답의 절반은 여기에 있다. 검정 잉크는 문자 인쇄에 가장 많이 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삼색 겹침이 만들어내지 못한 어둠을 대신 채우는 보험이다.
실험은 거창하지 않다: 이미징 소프트웨어, 잉크젯, 투명 필름
논문이 제안하는 시연은 값비싼 장비를 요구하지 않는다. 이미징 소프트웨어로 이미지를 CMYK 채널로 분해하고, 잉크젯 프린터로 투명 필름에 각 채널을 따로 출력한 뒤, 그것들을 겹쳐 보는 방식이다. 저자의 표현을 빌리면 물리 교사는 '몇 번의 키 입력'만으로 감산 혼합 시연에 도달한다. 층을 하나씩 얹을 때마다 이미지가 어떻게 변하는지를 학생이 직접 눈으로 따라갈 수 있다는 점이 핵심이다.
이 방식의 장점은 시간 축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모니터에서는 세 색이 동시에 더해지므로 중간 과정이 보이지 않는다. 반면 필름을 겹치는 과정은 물리적이고 순차적이다. 시안만 있을 때, 시안 위에 마젠타를 얹었을 때, 다시 옐로를 얹었을 때 각각 무엇이 보이는지가 단계별로 남는다. 감산 혼합이 '빼는' 과정이라는 사실이 말이 아니라 손끝의 순서로 전달되는 셈이다.
잉크젯으로 인쇄된 글자의 확대 사진. 1mm 축척 아래에서 개별 잉크 방울이 보이고, 색은 이미 점들의 배열로 이루어져 있다. Ulfbastel,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확대해 보면 색은 점들의 합주다
필름을 겹쳐 보는 실험은 자연스럽게 다음 질문으로 이어진다. 그렇다면 인쇄된 색은 정말 연속적인가. 확대경을 대면 답이 나온다. 종이 위의 색은 매끄러운 면이 아니라 작은 점들의 배열이고, 우리 눈은 그 점들을 평균 내어 하나의 색으로 지각한다. 감산 혼합은 잉크 한 방울의 성질이 아니라, 배열과 밀도가 만드는 통계적 효과이기도 하다.
논문은 이 지점을 깊게 파고들지는 않는다. 다만 잉크젯 프린터와 투명 필름이라는 도구가 왜 감산 혼합 교육에 적합한지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인쇄가 층과 점으로 이루어진 공정이라는 성격이 드러난다. 색을 물리량으로 다루는 수업과 색을 공정으로 다루는 수업이 여기서 만난다.
반론: RGB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가장 자연스러운 반론은 이것이다. 화면과 조명이 지배하는 시대에 감산 혼합을 굳이 교실에서 다뤄야 하는가. 가산 혼합만 확실히 가르치고, 인쇄는 직업 교육에 맡기면 되지 않느냐는 것이다. 논문의 논리는 이 반론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교육 과정에 생긴 비대칭을 문제 삼는다. 학생들은 이미 두 체계를 모두 쓰고 있는데, 학교는 그중 하나만 설명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반론은 도구의 접근성에 관한 것이다. 컬러 잉크젯 프린터와 투명 필름, 그리고 CMYK 분해를 지원하는 이미징 소프트웨어가 모든 학교에 있는 것은 아니다. 논문이 제안하는 절차는 저비용이지만 비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며, 학교마다 장비 사정이 다르다. 저자도 이 점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 시연은 실험실 예산이 아니라 교사의 준비 시간에 의존하는 수업이라는 성격이 강하다.
논문이 스스로 인정한 한계
이 글은 새로운 이론을 제시하는 논문이 아니다. 감산 혼합의 물리 자체는 오래전에 정리된 내용이고, 논문의 기여는 그것을 교실에서 시연하는 절차와 도구의 조합에 있다. 따라서 이 논문을 읽을 때 기대할 것은 새로운 발견이 아니라, 이미 알려진 개념에 대한 접근성의 개선이다. 저자 역시 미술과의 관행을 빌려왔다고 명시한다.
또한 논문은 시연의 효과를 측정하지 않는다. 학생들이 이 실험을 본 뒤 가산 혼합과 감산 혼합을 얼마나 정확히 구분하게 되는지, 오개념이 얼마나 줄어드는지를 보여주는 데이터는 제시되지 않는다. 교육 논문으로서는 아쉬운 지점이지만, 동시에 이 글이 주장이 아니라 제안의 형식으로 쓰였음을 분명히 해 준다. 논문은 이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주장하지만,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학습 결과 데이터는 이 글 안에 없다.
독자에게: 당신의 프린터는 무슨 색을 빼고 있는가
집에 있는 프린터의 잉크 잔량을 한 번 보자. 검정이 유난히 빨리 줄어드는지, 아니면 시안이 먼저 바닥나는지. 그 차이는 무엇을 주로 인쇄하는지뿐 아니라, 어떤 색을 겹쳐서 만들고 있는지를 말해 준다. 오늘 인쇄한 사진 한 장을 확대해 보면, 거기에는 매끄러운 색이 아니라 점들의 합주가 있다.
당신은 색을 더하는 쪽과 빼는 쪽 중 어느 쪽으로 세상을 더 자주 보고 있는가. 그리고 학교에서 배운 삼원색과 손에 들린 카트리지가 어긋난 채로 남아 있는 것이 과연 문제가 아닌지, 한번 따져볼 만하다.
참고 자료
David Marasco, 「Getting the picture - Subtractive color mixing with an inkjet printer」, arXiv:2611.06943v1 (physics.ed-ph), 2026년 11월 2일 제출. https://arxiv.org/abs/2611.06943v1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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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1.06 16:25
투명 필름에 CMYK 한 장씩 따로 뽑아서 겹치는 방식 괜찮네 ㅋㅋ 모니터는 한 방에 색이 나오니까 중간 과정이 아예 안 보이잖아. 근데 필름 겹치면 빛이 두 번 통과하는 거니까 실제 종이보다 밝게 보이지 않으려나 ㄷㄷ 그건 논문에서 따로 안 다뤘나 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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