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7일 오전, 에든버러의 KPMG 사무실에서 한 장짜리 보고서가 공개됐다. 스털링대학교 소매연구소(Institute for Retail Studies)와 부동산 데이터 회사 로컬 데이터 컴퍼니(Local Data Company, LDC)가 스코틀랜드 상위 100개 도시·타운을 대상으로 만든 첫 도심 상가 조사였다. 보고서의 첫 문장은 단호했다. 스코틀랜드 타운 다섯 곳 중 한 곳은 공실률이 20%를 넘는다. 가장 나쁜 곳은 애버딘셔의 밴프(Banff)와 헌틀리(Huntly)로 30%를 웃돌았다. 스코틀랜드 전체 평균은 14.5%로 영국 평균 14.1%보다 높았다.
그런데 같은 보고서 안에는 정반대 방향의 숫자도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인버루리(Inverurie)의 공실률은 2%였다. 한 나라의 '상권 위기'를 한 단어로 묶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 글은 그 격차가 왜 생겼는지, 그리고 보고서를 쓴 사람들이 왜 '가게를 줄여라'고 말했는지를 한국 상가의 언어로 옮겨 읽어 보려 한다.
100개 타운 중 5곳은 공실 5% 미만이었다
보고서의 숫자를 순서대로 펼치면 이렇다. 스코틀랜드 상위 100개 도시·타운 가운데 다섯 곳 중 한 곳(20%)이 공실률 20% 이상이었고, 반대로 5%의 타운은 공실률이 5% 미만이었다. 빈 점포가 몰린 곳에서는 상황이 더 나빴다. 스코틀랜드 도시·타운의 3분의 1에서, 빈 점포의 70%가 1년 넘게 비어 있었다. 일시적인 이사가 아니라 사실상 방치된 공간이라는 뜻이다.
규모도 제각각이었다. 60개 도시·타운은 점포가 100곳을 넘었고, 글래스고는 5,000곳이 넘는 점포를 가진 스코틀랜드 최대의 쇼핑 도시로 꼽혔다. 도시별로는 인버니스(Inverness)가 18%로 시 단위에서 가장 높은 공실률을 기록했다. 같은 스코틀랜드 안에서도 고속도로변 위성도시와 하일랜드 관광도시, 북동부 항구도시의 사정이 서로 달랐다는 것이 이 표의 요지다.
영국 상가의 뼈대: leasehold라는 99년짜리 열쇠
이 보고서는 임대 계약 조건을 다루지 않는다. 그래서 영국 상가 제도에 대한 설명은 일반적 배경으로만 적는다 — 이 기사에서 확인되지 않은 부분임을 밝혀 둔다. 영국 상업용 부동산은 크게 두 가지 권리로 나뉜다. 하나는 freehold, 우리말로 '완전 소유권'이다. 땅과 건물을 기한 없이 갖는 권리다. 다른 하나는 leasehold, '임차권'인데 영국에서는 이게 단순한 월세 계약이 아니다. 건물주가 99년이나 125년 같은 긴 기간의 임차권을 따로 만들어 팔고, 그 임차권을 산 사람이 다시 세입자에게 공간을 빌려주는 구조가 흔하다.
한국의 상가 임대차와 비교하면 차이가 선명하다. 한국은 보증금을 맡기고 월세를 내며, 자리 자체의 영업 가치를 '권리금'으로 사고파는 관행이 있다. 영국에는 그런 권리금 개념이 법제로 자리 잡고 있지 않고, 대신 임차권 자체가 거래되는 자산이 된다. 장기 임차권을 가진 사람은 그 권리를 다시 팔 수 있지만, 남은 기간이 짧아지면 값이 급격히 떨어지고 갱신 협상에서 건물주에게 힘을 빼앗긴다. 하이스트리트(High Street, 영국 도시 중심의 간선 상가거리)의 빈 점포가 '1년 넘게' 비어 있다는 보고서의 표현은, 이 권리 구조가 빚어내는 장기 공실과 무관하지 않다는 정도로만 읽어 두자.
밴프 하이스트리트 — Hugh Venables, CC BY-SA 2.0 (Wikimedia Commons)
비어 있는 것은 '거리'만이 아니었다
보고서는 공실을 하나의 숫자로 뭉개지 않았다. 저자들은 업종 구성의 변화를 따로 짚었다. 스코틀랜드 타운에서 독립 소매업(체인에 속하지 않은 개인 점포)이 차지하는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2012년에서 2013년 사이 스코틀랜드 도시들의 소매 업종 다양성은 퍼스(Perth)를 빼고 모두 줄었다고 적었다. 다시 말해 가게 수가 줄어든 것과, 남은 가게들이 비슷비슷해진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옷가게가 빠진 자리에 또 다른 옷가게가 들어오는 식의 재편은 공실률 숫자에는 잘 잡히지 않는다.
보고서를 낸 로컬 데이터 컴퍼니의 매튜 홉킨슨 대표는 원인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소비 지출의 압박, 슈퍼마켓을 포함한 도심 밖 소매의 부상, 그리고 인터넷 판매의 꾸준한 성장이다. 임대료 이야기는 그의 인용문에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도심 밖으로 나간 소비'라는 공간 이동, 그리고 '매장 밖에서 일어나는 구매'라는 채널 이동이 지목됐다.
'가게 수를 줄여라'라는 처방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KPMG 소매 부문 총괄 데이비드 매코쿼데일의 발언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하이스트리트가 '번성하는 곳'과 '겨우 살아남는 곳'으로 양극화되고 있다고 진단한 뒤, 빠른 해법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어 대부분의 경우 하이스트리트의 점포 수를 줄이고 그 자리에 레저와 주거 용도를 되살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말로 옮기면 '가게를 더 들여보내는 것이 아니라, 가게였던 건물을 다른 용도로 바꿔 쓰자'는 것이다.
여기서 통념이 한 번 뒤집힌다. 하이스트리트 공실률 30%라는 헤드라인은 흔히 '상권의 몰락'으로 읽힌다. 그러나 이 보고서의 저자들이 제시한 그림은 '용도 전환'에 가깝다. 빈 점포를 다시 소매점으로 채우는 것이 아니라, 소매가 필요 없는 공간을 카페·문화·주거로 바꾸는 방향이다. 스털링대 소매연구소의 리 스파크스 교수도 그 해법 중 하나가 '새로운 용도와 공간의 집중'일 것이라고 말했다. 빈 가게는 실패의 흔적이 아니라, 도시 기능이 재배치되는 과정의 부산물일 수 있다는 해석이다.
한국과 견주기: 임대료가 아니라 '유동인구의 목적지'
한국에서 비슷한 처지의 상권을 하나 꼽자면, 대학가나 구도심 간선상가가 아니라 '지방 중소도시의 옛 중심지'가 가깝다. 큰 길을 따라 은행과 옷가게, 약국이 늘어섰지만, 대형마트와 온라인 쇼핑, 그리고 신도심 개발로 손님의 동선이 빠져나간 곳들이다. 공실이 한 번 생기면 권리금이 붙어 임차인을 구하기 어려워지고, 보증금과 권리금이 오히려 새 세입자의 진입 장벽이 되는 구조는 한국 쪽이 더 딱딱하다.
공통점은 원인이다. 두 나라 모두 '가게 안에서 사던 소비'가 '도심 밖이나 화면 안'으로 이동하면서 중심 상가가 먼저 비었다. 차이는 대응 방식에 있다. 영국은 장기 임차권이라는 제도가 있어 건물 소유자와 점포 운영자가 분리되어 있고, 그래서 '용도를 바꾸자'는 논의가 건물 단위에서 가능하다. 한국은 상가 건물주가 소유와 임대를 동시에 쥐고 있어, 점포 수를 줄이는 대신 임대료를 조정하거나 업종을 바꿔 채우는 쪽으로 움직이기 쉽다. 어느 쪽이 낫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빈 점포'를 채우는 속도와 '빈 건물'을 다른 용도로 돌리는 속도가 다르다는 점은 비교해 볼 만하다.
이 자료가 누구의 시선인가
사료의 한계를 짚어야 한다. 이 글의 원천은 2013년 12월 스털링대학교가 낸 보도자료 한 편이다. 수치의 출처는 LDC의 조사이고, 인용된 논평은 스털링대 연구자와 LDC, 그리고 KPMG 관계자의 것이다. KPMG는 상권 재편 컨설팅을 파는 회사이고, LDC는 공실 데이터를 상품으로 파는 회사다. '공실이 심각하다'는 진단과 '용도를 바꿔야 한다'는 처방은 그들의 사업 영역과 정확히 겹친다.
또 하나, 이 기사는 특정 점포나 상인의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 타운 단위 집계만 제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왜 문을 닫았는가'라는 개별 사정은 이 자료만으로는 알 수 없다. 공실률 30%가 곧 그곳 상인들의 실패를 뜻하지는 않는다. 10년이 넘은 자료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2013년의 수치를 오늘의 스코틀랜드 상권으로 그대로 옮겨 읽을 수는 없다.
독자에게
빈 가게가 늘어난 거리를 볼 때, 우리는 보통 '장사가 안 된다'는 한 가지 설명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러나 스코틀랜드의 이 보고서는 같은 거리 안에서도 공실률 2%와 30%가 공존한다는 것을 보여줬다. 여러분 동네에서 오래 비어 있는 점포를 본다면, 그 자리는 정말 '가게로는 안 되는 자리'일까. 아니면 원래 가게가 아니었어야 할 자리를 가게로 쓰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참고 자료
· 'Retail report shows health of Scottish high streets', University of Stirling 보도자료, 2013년 12월 17일 — https://www.stir.ac.uk/news/2013/12/retailreportshowshealthofscottishhighstreets/
· 원 보고서: University of Stirling Institute for Retail Studies & Local Data Company, 스코틀랜드 상위 100개 도시·타운 도심 상가 조사(2013)
댓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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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2026.11.06 17:27
공실 2%인 인버루리랑 30%인 밴프가 같은 나라 안에 있다는 대목에서 저도 멈칫했어요. 저는 동네 골목에서 10년 넘게 셔터 내려진 가게를 볼 때마다 '장사 감각이 없었나' 하고 사람 탓부터 했는데, 원래 가게로 쓰기엔 애매한 자리를 억지로 채워온 결과일 수도 있겠네요. 저희 동네에도 은행 자리가 비면 또 약국, 또 편의점으로 채우는 식이라 결국 다 같이 비슷해지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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