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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암호는 51년 만에 풀렸는데, 정체는 아직 — 조디악 340자 암호

빗방울 2026.11.05 14:01 12분 읽기 조회 17 · 추천 2

1969년 11월 8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 편집국으로 카드 한 장이 도착한다. 축축한 잉크가 흐른 듯한 표지에는 340개의 기호가 정확히 17행 20열로 빽빽하게 적혀 있었다. 보낸 사람은 이 암호를 1면에 실으라고 요구했고, 신문사는 다음 날 그 기호표를 실제로 1면에 인쇄했다. 그날로부터 51년 뒤인 2020년 12월 5일, 아마추어 세 사람이 모니터 앞에서 'I hope you are having lots of fun in trying to catch me'라는 해독문을 확인한다. 18,470일 걸린 해독이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암호가 풀린 사실은 발표됐고, 해독문은 FBI 암호해독단위의 검증까지 통과했다. 그런데 수사 파일에 새 용의자가 추가되지는 않았다. 이 사건이 60년 가까이 회자되는 이유는 암호가 어려워서가 아니라, 암호 해독이 수사에 거의 아무것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글은 '풀린 것'과 '아직 못 푼 것'을 최대한 분리해서 정리한다.

사건의 윤곽 — 확인된 것만

조디악 킬러(Zodiac Killer)는 1968년 12월부터 1969년 10월까지 캘리포니아 베이에어리어에서 최소 5명을 살해하고 2명을 살려 둔 미상의 연쇄살인범이다. 첫 희생자는 1968년 12월 20일, 베니시아의 레이크 허먼 로드에 주차된 차 안에서 총살당한 10대 커플 베티 루 젠슨(16)과 데이비드 패러데이(17)다. 1969년 7월 4일에서 5일로 넘어가는 자정 무렵에는 밸레이오의 블루록 스프링스 공원 주차장에서 커플이 총격을 받아 여성이 숨졌다. 9월 27일에는 나파 카운티의 레이크 베리에서 커플이 칼로 찔렸다. 마지막으로 10월 11일 샌프란시스코 프레시디오 하이츠에서 택시기사 폴 스타인이 사살됐다.

생존자 두 명은 이후 수십 년간 이 사건의 기억을 안고 살았다. 여기서부터는 피해자의 삶을 소재로 삼지 않겠다. 확인된 사실만 정리하면 이렇다. 현장에는 유효한 지문이 남지 않았고, 목격자는 차량 색과 체격 정도만 기억했다. 당시 법의학은 1960년대 수준이었고, 그 시대 증거물의 DNA 보존 상태로는 지금의 유전계보학 수준까지 끌어올리기 어렵다. 대신 범인은 직접 흔적을 남겼다. 편지, 기호, 필체, 그리고 암호.

340자, 왜 51년이 걸렸나

흔히 '난수로 만든 완벽한 암호'로 불리지만, 실제 어려움은 훨씬 기술적이다. 조디악은 앞선 408자 암호에서도 글자 기호를 쓰면서 일부를 의도적으로 생략한 흔적이 있다. 그런 기호표는 통계 분석이 통하지 않게 된다. 같은 글자가 같은 기호로 1:1 대응하지 않으면 빈도 분석의 토대가 무너진다. Z340에는 조디악이 만든 '실수'가 하나 더 겹쳤다는 해석이 지배적이고, 그 실수가 해독을 오히려 어렵게 만들었다고 솔버들은 설명한다.

해독 경위도 구체적이다. 미국의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데이비드 오런착, 오스트레일리아의 수학자 샘 블레이크, 벨기에의 프로그래머 자를 판 에이커가 참여했다. 판 에이커가 만든 AZdecrypt로 65만 건 규모의 후보 해석을 돌려 가중치가 가장 높은 해독키를 찾아냈다. 단순히 '컴퓨터가 푼'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설을 세우고 기계가 검증하는 방식이었다.

해독문이 담은 것은 협박이 아니라 자기 합리화

해독문의 내용은 예상보다 시시하다. 조디악은 TV 프로그램에 '샘(Sam)'이라는 이름으로 출연한 인물 — 사후 조사에서 정신병원 환자 에릭 와일로 밝혀졌다 — 이 자기라고 한 것을 부인하고, 가스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유는 자신이 '낙원(paradice)'에 갈 것이기 때문이다. 조디악은 이 단어를 계속 'paradise'가 아니라 'paradice'로 적었다. 'fan', 'bringo', 'becaase', 'sooher' 같은 철자 오류도 원문에 그대로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해독문이 '누구'에 대해 한 글자도 말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범행 동기, 공범 여부, 다음 범행 계획, 정체를 암시하는 이름 — 어느 것도 없다. 서한 작가가 자기 변호에 쓴 분량이 대부분이고, 수사팀이 원하던 정보는 들어 있지 않았다. FBI의 결론도 명확했다. 해독은 사실이나, 범인의 신원에 대한 단서를 제공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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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11월 8일 크로니클에 도착한 카드에 담긴 340자 암호 원본 — 저작자 미상(사건 기록),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가설 하나 — 암호는 '정체 은폐' 장치였을 뿐이라는 주장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은 조디악이 암호를 쓴 목적 자체가 정보 은닉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신문사 편집국을 흔들고, 1면 보도를 강요하고, 경찰을 조롱하는 것이 목적이었다면 암호는 무해해도 된다. 실패하거나 풀려도 목적은 달성된다. 해독문에 '잡아 보라'는 조롱만 있고 실질 정보가 없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설계라는 것이다.

약점은 분명하다. 이 해석은 반증이 불가능한 데 가깝다. 암호가 정보를 담고 있었으면 '담겼는데 못 찾았다', 없었으면 '원래 없는 게 맞다'로 어떻게든 말이 된다. 반증 가능한 예측을 내놓지 못한다는 점에서 학술적이라기보다 사후 해석에 가깝다.

가설 둘 — 필적과 정황이 증거의 중심이라는 주장

경찰이 공식적으로 이름을 밝힌 용의자는 아서 리 앨런이다. 전직 초등학교 교사였고 아동 성범죄 전과가 있으며, 1992년 8월 26일 사망했다. 여러 정황이 그를 가리킨다. 수사관들은 그의 필적 샘플과 '조디악' 브랜드 손목시계 착용, 신발 사이즈 10.5라는 일치점을 두고 논쟁했다. 1970년대 수사에서는 스타인 택시에서 나온 지문과 그의 지문이 일치하지 않았고, 필적도 단정적으로 연결되지 못했다.

2024년 이후 일부 매체와 연구자가 제시한 새 분석에서는 앨런의 필적과 조디악의 필적 사이에 높은 일치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약점은 이 주장이 경찰이나 법의학 기관의 공식 검증을 거치지 않았고, 사망한 사람의 필적을 대상으로 사후에 이루어진 비교라는 점이다. 필적 비교는 법정 증거로서 신뢰도 논란을 꾸준히 겪어 왔다는 사실도 여기에 붙는다.

가설 셋 — 다른 암호가 힌트라는 가설

조디악은 모두 네 개의 암호를 남겼다. 1969년 7월에 신문사 세 곳으로 나눠 보낸 408자 암호는 1주일 만에 자원봉사자 부부가 풀었다. 1969년 11월의 Z340, 1970년 4월의 13자 암호, 1970년 6월의 32자 암호가 남는다. 2020년의 해독 키를 13자 암호에 적용하면 'Dr. Eat a Torpedo'라는 해석이 나온다는 주장도 있다. 이들은 조디악이 당시 암호학계에 보낸 조롱이라는 추측으로 이어진다.

약점은 명확하다. 13자와 32자 암호는 지금도 확정 해독이 없다. 키 하나를 재사용했다는 전제부터 검증되지 않았고, 짧은 암호는 어떤 해석이든 끼워 맞추기 쉽다. 'Dr. Eat a Torpedo' 역시 재미있는 가설 이상으로 취급되지 않는다.

반전 — 실제로 반증된 것은 '유명 용의자' 쪽이다

대중이 아는 이야기와 사료가 엇갈리는 지점은 여기다. 영화와 다큐멘터리가 가장 유명하게 다룬 인물은 앨런이지만, 공식 수사 기록은 그를 기소하지 못했다. 2000년대 이후 DNA 검사가 진행되면서 앨런의 DNA와 증거물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결과가 여러 차례 보도됐으나, 어떤 검사가 어느 정도로 확정적인지는 매체마다 서술이 다르다. 'DNA로 무죄가 확정됐다'고 단정하기도, 'DNA는 오염돼 의미가 없다'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더 흥미로운 반전은 암호 해독 자체에 붙은 수사의 함정이다. 2020년 해독 발표 이후 일부 보도는 '사건이 풀렸다'는 식으로 썼고, 다른 일부는 '해독이 조작됐다'고 주장했다. 실제로는 둘 다 아니다. 해독은 검증되었고, 사건은 그대로 미제다. 문제는 대중이 '해독 = 해결'이라는 등식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암호는 범인의 목소리였고, 목소리는 증거가 아니었다.

사료의 한계 — 편지가 남긴 왜곡

이 사건 자료의 대부분은 범인이 직접 쓴 것이다. 편지, 카드, 암호, 지도. 수사기관이 작성한 기록은 상대적으로 적고, 대중은 범인이 만든 서사를 그대로 읽는다. 조디악은 1974년 편지에서 자신이 37명을 죽였다고 주장했는데, 확인된 희생자는 5명이다. 이 37이라는 숫자가 오늘날까지 '조디악은 37명을 죽였다'는 식으로 유통되는 것은 사료 비평 없이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인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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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7월 31일 샌프란시스코 이그재미너가 1면에 인쇄한 408자 암호. 이 암호는 1주일 만에 풀렸고, 이후 340자 암호가 51년을 버텼다 — 저작자 미상(신문 지면),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여기에 상업적 각색이 겹친다. 2007년 영화 '조디악'은 수사관의 집요함을 중심으로 그리며 관객에게 '거의 잡을 뻔했다'는 감각을 준다. 실제 수사는 그렇게 극적이지 않았다. 수사는 흩어졌고, 부서 간 정보 공유는 원활하지 않았으며, 관할이 달라 서로의 기록을 모르는 일도 흔했다. 기록 하나하나를 읽으면 영화의 긴장은 대부분 편집으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지금 우리에게 남은 것

2026년 현재 이 사건은 캘리포니아 법무부, FBI, 밸레이오 경찰, 나파·솔라노 카운티 셰리프가 공식적으로 '미해결(open)' 상태로 유지하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경찰이 2004년에 잠시 '비활성'으로 분류했다가 2006년 재개한 이력도 있다. 2020년 해독은 수사 재개를 촉발하지 못했다. 해독문이 새 용의자를 지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 사건이 계속 회자되는 이유는 범인의 정체가 아니라 '증거가 남았는데도 결론이 나지 않는 구조' 때문이다. 암호는 풀렸고, 필적은 비교됐고, DNA는 검사됐고, 용의자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것도 유죄 판단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범죄 이야기라기보다, 증거가 결론을 만들지 못하는 순간에 대한 기록이다.

독자에게

여러분에게 묻고 싶다. 만약 2020년의 해독문에 이름 한 줄이 들어 있었다면, 그 이름만으로 51년 전 사건을 기소할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것도 또 하나의 '주장'으로 남았을까. 암호가 풀린 지 6년이 지난 지금, 이 사건에서 우리가 실제로 얻은 것은 범인의 신원이 아니라, 증거와 결론 사이의 거리를 재는 법일지도 모른다.

참고 자료

위키백과, 'Zodiac Killer' — https://en.wikipedia.org/wiki/Zodiac_Killer
위키백과, 'Arthur Leigh Allen' — https://en.wikipedia.org/wiki/Arthur_Leigh_Allen
위키소스, 'Zodiac Killer letter, November 8th 1969' (Z340 1차 사료) — https://en.wikisource.org/wiki/Zodiac_Killer_letter,_November_8th_1969
Wikimedia Commons, '4abc - San Francisco Chronicle Dripping Pen Card November 8 1969 340 Cipher COLOR.jpg' (퍼블릭 도메인)
Wikimedia Commons, 'Zodiac Killer cipher, San Francisco Examiner, July 31st 1969.jpg' (퍼블릭 도메인)
Joachim von zur Gathen, 'Unicity Distance of the Zodiac-340 Cipher', Cryptologia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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