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23일 미국 패션·유통 전문지 WWD는 유럽 명품 거리 하나에 대한 숫자를 하나 크게 뽑아들었다. 2025년 한 해 동안 유럽 16개 도시·12개국 대표 명품 거리 20곳에서 문을 연 명품 매장은 96곳. 부동산 컨설팅사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Cushman & Wakefield)의 「유럽 명품 유통 보고서」가 내놓은 이 숫자는 전년보다 13% 늘었다. 그런데 이 기사에서 가장 눈에 걸리는 문장은 “빈 자리가 없다”는 대목이 아니라 그 다음 문장이다. 공간이 모자라자 브랜드들이 건물의 위층으로, 그리고 옆 호실로 올라가고, 인접한 거리로 밀려났다는 것이다.
상권이 죽으면 점포가 비고, 점포가 비면 임대료가 내려간다. 우리가 상권 기사를 읽을 때 머릿속에 그리는 그림이다. 프랑스 파리 오페라 일대, 이탈리아 밀라노 몬테나폴레오네 거리처럼 유럽 최상위 명품 거리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 그림의 정반대다. 공실은 0에 가깝고, 임대료는 오르고, 그래서 매장은 아래가 아니라 위로, 옆으로 비집고 들어간다. 이 글은 이 “빈 자리의 경제”를 어디까지 기사로 확인할 수 있고 어디부터 확인되지 않는지 나눠서 읽는다.
96곳, 20개 거리 — 무대는 어디인가
기사가 추린 무대는 20개 “핵심 명품 거리”다. 보고서가 직접 든 도시는 밀라노, 파리, 제네바, 마드리드, 리스본, 런던이다. 기사에 함께 실린 사진 설명이 보여주는 거리 이름은 더 구체적이다. 밀라노의 비아 몬테나폴레오네(Via Montenapoleone·밀라노 명품 거리의 대명사), 파리에 새로 문을 연 디올 부티크가 있는 퓌 생토노레(Rue Saint-Honoré·루브르와 오페라 사이를 잇는 가로), 로마의 비아 데이 콘도티(Via dei Condotti·스페인 광장에서 이어지는 명품 가로)다.
이 거리들이 유럽 상권 전체를 대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유럽 고등법원(High Street)의 주름진 셔터와 이 명품 거리의 빈자리는 같은 사정 위에 서 있지 않다. 보고서의 관심은 “가장 비싼 땅에서 가장 비싼 브랜드가 겨루는 좁은 거리”에 맞춰져 있고, 그래서 이 숫자를 유럽 전체 유통업의 건강 진단서로 읽으면 진단이 틀어진다.
숫자로 본 2025년 — 누가 이 거리를 채웠나
96곳을 채운 주체는 루이뷔통모에헤네시(LVMH), 케링(Kering), 리슈몽(Richemont) 같은 대형 명품 그룹이었다. 세 그룹의 브랜드가 전체 신규 개점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나머지 70%는 57개 다른 브랜드·브랜드 그룹에서 나왔다. 기사는 그 예로 토템(Toteme)을 들어, 이 브랜드가 2025년 쿠시먼이 추린 핵심 거리에 매장 3곳을 열었다고 적었다.
업종별로 보면 패션·액세서리가 선두였다. 20개 거리에서 40개 브랜드가 48개 매장을 열어 전체 활동의 절반을 채웠고, 2024년보다 17% 늘었다. 보석·시계는 2025년 28곳으로 전년과 같았지만 2023년 대비로는 거의 30% 높다. 뷰티·향수는 “추세가 형성되고 있다”는 표현으로 소개됐고, 파리에서는 2025년 고급 향수 매장이 6곳 문을 열었다. 기사의 사진 설명이 파리의 새 디올 부티크와 로마의 쇼메 매장을 함께 배치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image:1]]
밀라노 비아 몬테나폴레오네 거리 — 유럽 명품 거리의 대표 사례 — Daniel Case, CC BY-SA 3.0 (Wikimedia Commons)
공실 0%가 8곳 — “빈 자리”가 없는 시장의 규칙
기사에서 가장 구체적인 시장 조건은 공실률이다. 추적한 20개 거리 중 8곳은 공실률 0%였고, 추가로 6곳은 5% 미만이었다. 20곳 중 14곳에서 “빈 점포”를 사실상 볼 수 없다는 뜻이다. 그 결과 기사는 브랜드들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위층으로 올라가고, 옆 호실로 넓히고, 인근 거리의 다른 거리를 찾는 식으로 창의력을 발휘했다고 전한다. 지면의 한계를 위쪽과 옆쪽으로 우회한다는 것이다.
임대료 방향은 시장의 성격을 더 분명히 보여준다. 2025년 명품 거리 임대료는 3.5% 올랐고, 명품이 아닌 일반 하이스트리트 임대료도 3.3% 올랐다. 명품 거리의 상승폭이 조금 더 크지만, 두 숫자가 거의 붙어 있다는 점이 오히려 중요하다. 기사는 이를 “프라임 오프라인 유통 수요의 폭넓은 회복”으로 해석한다. 명품 소비 한 곳에만 열기가 몰린 것이 아니라, 값비싼 자리조차 임차 수요가 위로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기사에는 절대 임대료(제곱미터·제곱피트당 얼마)가 실려 있지 않다. 그 수치는 확인되지 않는다.
2018년과 2025년 — 온라인 전환이 남긴 흔적
기사에는 과거를 되돌아보는 한 문장이 있다. 유럽 명품 거리 임대료는 2018년 수준보다 7% 높다는 것이다. 2018년은 기사가 “소비자들이 온라인 쇼핑으로 점점 더 많이 돌아섰던 때”로 규정한 해다. 7년 동안 명품 거리의 임대료는 그 온라인 전환의 파고를 넘어 2018년을 조금 웃도는 자리까지 돌아왔다. 코로나19 이전 수준으로 “완전히 복귀”했다는 표현은 기사에 없고, 오직 7%라는 상대 수치만 있다.
여기서 흔한 해석이 하나 나온다. “온라인이 강해질수록 오프라인 매장은 쇼룸으로 변한다”는 설명이다. 기사는 그 방향에 가까운 증언을 담았다.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유럽·중동·아프리카 유통 총괄 로버트 트래버스는 명품 브랜드가 매장을 “문화적 선언”이자 “정체성·장인정신·유산의 물리적 구현”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래서 더 크고 몰입적인 플래그십, 여러 층을 쓰는 공간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쇼룸화”라는 단어가 기사에 있는 것은 아니며, 매출이나 방문객 수치도 제시되지 않았다. 이 부분은 전망으로 읽어야 한다.
임대료 다음에 오는 것 — 유럽의 상가 계약 구조
이 기사에는 상가 임대 계약의 구조, 즉 임대료 이외의 조건에 대한 설명이 없다. 계약 기간, 임차인이 부담하는 수리·보험 비용, 매출 연동 임대료, 중개·양도 조건이 모두 빠져 있다. 따라서 “왜 브랜드가 위층까지 쓰는가”를 계약 구조로 설명하는 것은 이 기사만으로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제도 배경은 짚어 둘 만하다.
한국 상가 임대의 중심에는 전세와 보증금, 권리금이 있다. 임차인이 목돈을 맡기고 월세를 내며, 장사 자리 자체의 영업 가치를 권리금으로 사고팔 수 있다. 영국은 건물의 소유권과 사용권을 나누는 임차보유권(leasehold·건물은 쓰되 땅은 소유자에게 남는 장기 임차 구조)와 완전소유권(freehold)이 오래된 축이고, 미국 상업용 부동산에는 세금·보험·유지비를 임차인이 부담하는 트리플넷리스(NNN)가 흔하다. 프랑스에는 점포를 빌리며 지급하는 일종의 자리값 파드포르트(pas-de-porte) 관행이 있고, 이탈리아 명품 거리는 이런 배경 위에서 다루어지지만, 이 기사는 그중 어느 것도 언급하지 않는다. 위 설명은 일반적 배경이며, 이번 기사로 확인된 내용이 아니다.
한국의 명동·가로수길과 무엇이 같고 다른가
한국 독자가 이 기사를 읽을 때 가장 가까운 비교 대상은 서울의 핵심 상권이다. 명동은 외국인 관광객 의존도가 높은 대로변 상권이라는 점에서 유럽 명품 거리와 구조가 닮았다. 방문객 구성이 바뀌면 업종 구성이 즉시 바뀌고, 임대료는 상승과 급락을 오간다. 반면 명품 거리의 계약은 훨씬 길고 브랜드 본사가 직접 들어오는 반면, 국내 핵심 상권은 개인 임차인의 비중이 크고 권리금이라는 별도 가격이 얹혀 있다. 임대료 상승이 곧 계약 갱신 실패로 이어지기 쉬운 쪽은 국내 상권이다.
가로수길처럼 한때 “가장 비싼 거리”로 불렸다가 공실이 늘어난 곳은 이 기사의 0% 공실과 정반대의 교훈을 준다. 같은 임대료 상승이라도 명품 거리에서는 빈 자리가 없어 위층으로 올라가고, 국내 상권에서는 빈 자리가 생기면서 임대료가 꺾였다. 유럽 보고서가 “프라임 거리”만 추려 본 숫자라서, 그 바깥의 하이스트리트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이 기사로는 알 수 없다. 한국의 상권도 특정 거리만 따로 보면 얼마든지 “회복”으로 보인다는 점, 그래서 표본의 범위가 곧 결론이라는 점이 두 사례에서 되풀이된다.
[[image:2]]
파리 퓌 생토노레 거리의 일반 점포 — WWD 기사에 실린 디올 부티크는 이 사진에 없습니다 — zoetnet, CC BY 2.0 (Wikimedia Commons)
시야의 한계 — 누구의 데이터인가
이 기사의 숫자는 한 곳에서 나왔다. 상업용 부동산 서비스회사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다. 기사는 WWD라는 패션·유통 전문지에 실렸고, 브랜드 개점 수와 임대료 상승률을 전면에 세운다. 이해관계를 따져 보면 이렇다. 부동산 회사는 임대차 시장이 활발하다는 신호를 내는 데 이해가 있고, 패션지의 고객은 브랜드와 그 유통망이다. 기사에 등장하는 유일한 인용은 쿠시먼 관계자의 발언이다. 임차인 쪽의 불만, 소규모 상인의 처지, 거리 밖으로 밀려난 매장의 사정은 들어 있지 않다. 이 기사를 “유럽 상권의 상태”가 아니라 “유럽 프라임 명품 상권의 상태”로만 읽어야 하는 이유다.
독자에게 묻는다
가장 비싼 거리에서 “빈 자리 없음”과 “임대료 상승”이 동시에 성립하는 시장이라면, 그 반대편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위층으로 밀린 임차인, 옆 거리로 밀려난 브랜드, 그리고 그 거리에서 장사하던 작은 가게. 당신이 자주 가는 동네 상권은 “비어 가는 상권”인가, 아니면 “아직도 채워지려는 상권”인가. 최근 1년 사이 그 거리에서 문을 연 가게와 닫은 가게를 하나씩 떠올려 보시라.
참고 자료
WWD, 「Luxury, Fashion Brands Competing for Prime Retail Space Across Europe」, 2026년 3월 23일 — https://wwd.com/business-news/retail/luxury-contemporary-brands-seek-prime-retail-europe-cities-1238685846/
배경: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 「European Luxury Retail」 보고서(기사 인용 기준). 임대료 절대값·계약 구조·매출 지표는 기사에 없어 이 글에서도 쓰지 않았다.
댓글1
-
빗방울
2026.11.07 23:31
임대료 3.5% 올랐다는 숫자만 봐도 답 나옴 ㅋㅋ 공실 0%인데 값 더 받을 데는 위층밖에 없지. 근데 기사에 계약기간이랑 매출연동 임대료는 빠져 있어서 브랜드가 왜 굳이 위층까지 올라가는지는 안 나옴 ㄷㄷ 그냥 그 자리 대체가 안 되니까 버티는 거라는 내 생각임 ㅇㅇ
모든 이야기2314
가벼운 안부부터 깊은 생각까지, 함께 나눠요.